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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나를 용서하고 세상을 용서하며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03)

2011-04-10 18:06

 
어릴 때부터 난 참 내성적이었다.
어두운 집안 분위기와 언니들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늘 놀이터 구석에서 혼자 놀곤 했다.
아빠는 집안일에는 무심한 채 밖으로만 돌면서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셨는데,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엄마를 심하게 때리곤 했다.
그래도 자식들에겐 동전도 쥐어 주고 과자도 사다 주곤 하셨는데, 난 아빠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정말 싫었다.

엄마는 아빠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생활비를 주지 않는 아빠 대신 우리 사형제를 뒷바라지하느라 늘 바쁘고 고단하셨다.
언니들도 자기 방에만 있었고, 그래서 난 항상 외로웠다.

그 당시 방이 여러 개였던 우리집은 세를 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비어 있던 골방에 아빠와 비슷한 나이의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 아저씨는 혼자 놀고 있는 내게 과자도 곧잘 사 주고 밥상을 차려서 나를 부르곤 했는데 난 아저씨가 꼭 아빠 같아서 아저씨 방에 자주 놀러 갔다.

그런데 몇 달 뒤부터 아저씨는 이상하게 돌변했다.
초등학교 2, 3학년 어린애에 불과한 내게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밥을 먹고 나면 아저씨 팔을 베고 잠들곤 하던 나는 처음엔 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잘 몰랐다.
뭔가 부끄럽고 좋지 않은 일이란 건 알았지만 물어 보거나 의논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나는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유치원 시절 고등학생이던 친척오빠들에게 당했던 일도 비슷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난 매일같이 이어지는 부모님의 싸움을 피해 친척집에 자주 머물렀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터라 오빠들이 시키는 대로 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철이 들고 아저씨한테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그 일이 끔찍한 일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엄마를 때리는 아빠의 잔인한 모습,
자상하던 아저씨가 한순간에 나를 농락했던 모습,
그리고 뻔뻔스런 친척오빠들….

차츰 나이가 들면서 나는 남자를 싫어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털어놓고 기댈 사람 하나 없었기에 점점 더 자신감을 잃고 내성적인 아이로 변해 갔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명랑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또 부모님의 이혼으로 더 이상 불안에 떨 일이 없어지면서 조금씩 밝아졌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즐겁게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덕분에 내 과거의 아픈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친구들에게 이끌려 놀러 온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간신히 잊어 가던 아픈 기억을 또 다시 떠올리는 일이 벌어졌다.
혼자 조용히 빠져 나와 숙소로 들어가다가 그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강제로 당하고 만 것이다.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가슴 깊이 분노가 치밀어 몇 달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술에 취하고, 분노에 취한 채 더욱 망가져 갔다.
몇 차례 임신과 중절을 거듭하며 마음은 피폐해져 가고 몸은 몸대로 엉망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이른바 윤락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빡빡한 생활에 쫓겨 늘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몰래 나갔고,
가족들 앞에선 착한 딸인 척하면서 밖에서는 내 멋대로 살았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이중적인 사람을 내가 닮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시각각 커져 오는 몸의 통증으로 온종일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며,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나는 병원 치료조차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언젠가 중절수술을 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 준 친구였다.
친구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윤진아, 넌 아무 죄가 없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너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리고 빨리 어두운 곳에서 나와…."
 
그날 나는 편지지가 얼룩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다.
내가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하지 못한 말.
그 말을 친구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그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분노와 증오가 어느새 사라지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나쁜 짓을 했던 남자들에게 분노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러웠고 그럴수록 자신이 더욱 바보 같았으니까.
내 자신에게만 화살을 돌리고,
가장 소중히 생각해야 할 "나"를 버렸던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이 두려워 먼저 선수를 쳤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큰 죄인처럼 지내는 건 스스로 무죄를 유죄로 만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증오는 거울과 같아서 어떤 상대를 증오하며 바라볼수록 그 증오는 곧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당당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을 용서했듯, 나를 울린 그 사람들도 이젠 용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