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년, 돌아보면 참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세월이다.
삶이란 이름으로 그 동안 우리 부부가 견뎌야 했던 생활을 돌아보니 마음이 아파 온다.
자라면서 난 왠지 시골이 좋았고, 만약 결혼을 한다면 농부의 아내가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이를 처음 만난 날, 첫눈에 반한 나는 그와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고 행복하리라 믿었다.
그이는 성실했고 따뜻했으며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시골 생활의 환상에 젖은 채 시집간 나를 잘 이끌어 주었고, 나 역시 그런대로 농촌의 아낙네로 적응해 갔다.
우리는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3천만 원을 대출받아 하우스 고추농사를 시작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하우스로 나갔고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거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일할 줄 몰라 쩔쩔매는 내게 그는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된다"며 웃었지만 난 일을 배우려 애썼다.
그렇게 온종일 고추 고랑 사이를 누비다 돌아오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드디어 첫 열매를 따던 날,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고추가 주렁주렁 달린 고추나무에 머리를 맞대고 우리는 한 나무에 몇 개가 달렸나 세어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주일 뒤면 가지가 몇 개 뻗고, 한 달 뒤면 몇 상자가 되는지를 계산하며 행복해했다.
올해는 농사가 잘되었고 고추 가격도 좋은 편이라 희망적이라며 그이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첫아이를 출산한 뒤 한동안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남편을 따라 하우스에 나갔다.
그 새 고추가 많이 자랐다고, 잎도 파랗고 좋다는 내 말에 그는
“그라모 내가 올매나 정성을 들이는데, 퍼뜩 가자 몸 상할라. 하우스 걱정 말고 몸조리 잘하고 애한테나 신경 써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 해 1993년 2월 23일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모진 비바람이 몰아쳤다.
밤새 하우스 비닐을 잡아 보겠다고 추위 속에 발버둥치며 싸우다 돌아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누웠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힌 그의 침통함을 위로할 길 없었다.
나도 옆에 나란히 누워 숨죽여 울 뿐이었다.
겨울 찬바람에 얼어 죽어 가고 있을 우리의 희망을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태어난 지 갓 한 달 된 첫아이를 보며 내년이 있으니 용기를 내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 뒤 하우스를 새로 정비하여 다시 고추농사를 시작했지만 이번엔 가격이 터무니없이 떨어졌다.
지난해 고추 가격이 좋아 너도나도 고추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월말이면 날아드는 농협과 축협의 독촉장, 농약방의 농비, 주유소의 기름값….
낮에는 하우스에 찾아와 더 이상 기름 못 주겠다 하고, 저녁이면 전화로 밀린 자재값을 갚아 달라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날들이었다.
조금이라도 고추값을 더 받아 보겠다고 새벽마다 마산역 번개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봤지만
소매로 팔 수 있는 양은 고작 몇 상자뿐이었다.
날마다 이자가 원금보다 늘어가니 번 돈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지났고,
게다가 작년 농사의 실패로 그 부채가 고스란히 남은 데다 올해 농비마저 해결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농작물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한 농촌에서는 시설 채소농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찍기를 잘해야 돈 번다, 작물 선택은 도박이다, 찍는 것에 따라 망할 수도 흥할 수도 있다"
는 아픔 섞인 농담이 오갈 정도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저 일편단심 풋고추 재배를 고집했는데도 운이 따라 주질 않았다.
죽고만 싶을 만큼 돈이란 게 없어 허덕이던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신음하는 남편보다 병원비 걱정이 더 컸다.
막막한 앞날을 생각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남편이 보증을 서 주었던 친구가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남편과는 30년 넘게 형제처럼 지내던 소꿉친구였는데….
그런 사람이 자기만 살겠다고 우리 논과 집이 압류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냉정히 돌아서 버린 것이다.
아! 그이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
가슴이 너무나 저렸다.
곧 농협과 축협에서 압류를 해 왔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이자도 연체되었고, 남편도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어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차가운 말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의 터전을 전부 내주고도 몇 천만 원의 부채를 떠 안은 채 고향을 떠나 객지로 나왔지만
월세 방을 얻을 형편도 안 돼 길거리에 나앉은 그 심정은 당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냈다.
용케도 잘 버텨 낸 것이다.
지금 우리 부부는 언젠가는 꼭 농촌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를 짓겠다는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용기를 내어 조그만 분식집도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우리 힘으로 시작한, 우리의 희망을 키우는 소중한 터전이다.
절망 끝에 서 보니 새로운 희망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실패를 실패로 끝낼 수는 없다.
오늘도 나와 남편은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일어설 날을 꿈꾸며 비상의 날갯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