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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그래도 내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잖아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4)

2011-04-15 08:18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낙망하지 말고 웃으며 살자. 그러나 더 이상은 심해지지 말아다오."


하루에도 몇 번씩 간절히 바랐지만 여지없이 내게도 합병증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끔 심한 빈혈과 다리 통증으로 대부분을 누워 지내야만 하는데
며칠 전에는 소변마저 볼 수 없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 무슨 날벼락인지 평소 혈압이 높으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져 꼼짝도 못하시는 게 아닌가.
황급히 병원으로 모셨더니 중풍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건강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하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살았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우리 오남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시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꼭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병명은 결핵성 뇌막염.
두 달 정도 치료받았지만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기에 의사선생님께 내 상태를 물었더니 죽지 않으면,
고쳐진다 해도 반신불수가 되는 치명적인 병이라고 했다.
스스로 아닐 거라고 위로하며 낫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결국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 석 달쯤 치료받은 뒤 퇴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퇴원해서 걸음을 떼 보니 왼쪽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뇌막염 후유증으로 불구가 된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설상가상으로 엄마마저 자리에 누우셨다.
엄마도 많이 아팠는데 나를 간호하느라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버티시다가 내가 퇴원하자 그만 자리에 눕고 만 것이다.
나는 내 몸 돌볼 겨를도 없이 불편해진 다리를 절뚝거리며 엄마를 모시고 울산에 있는 병원마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결같이 자궁암 말기로 치료 불가능이란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돌아서야만 했다.
치료해 달라고 울며 매달렸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날마다 고통에 시달리는 엄마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 끝에 대통령께 우리 엄마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 덕분인지 부산복음병원에서 한 달 동안 무료로 방사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닿았다.
그 다음날부터 엄마와 나는 울산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왕래하면서 통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힘들게 치료받은 보람도 없이 엄마는 그 해 겨울 끝내 하늘나라로 가 버리셨다.

엄마를 잃은 슬픔 때문일까?
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졌다.
지팡이가 없으면 걸을 수조차 없게 되자 너무 겁이 나고 불안해
그때부터 아버지와 동생이 벌어 오는 생활비로 물리치료, 침, 다리 마사지 등 몸에 좋다는 곳을 다 찾아다녔지만 병세는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런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공고에 다니던 둘째동생이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방학 동안 용돈이라도 벌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손 검지 한 마디가 기계에 잘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식구들이 걱정할까 봐 집에 연락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장애인이 되고 엄마도 우리 곁을 떠나 속상한데 거기다 동생까지….
마음이 아파 그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를 부둥켜안고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죄인이다” 하며 함께 우셨다.

날이 갈수록 내 몸은 점점 허약해져 갔다.
척추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구부러지더니 오른쪽 다리까지 마비되어 더 이상 지팡이를 짚고도 걸을 수가 없었다.
"죽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된다더니 정말 그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사라져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어느 날, 옆집에 살던 분을 따라 기도원에 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식물인간이 되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누워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튜브로 음식을 받아먹는 수많은 환자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저들보다 낫구나,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도 있고 또 내가 먹을 수도 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용기를 내자"고 다짐했다.
그 뒤 용변 보는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힘들 때,
병원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요즘 나는 감각 없는 손으로 글쓰기 연습을 새롭게 시작했다.
삐뚤삐뚤한 글씨지만 이나마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늘 옆에서 내 손발이 되어 주며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가족들.
특히 1급 장애인이 된 나를 위해 머리 감겨 주고, 목욕시켜 주고, 빨래해 주고,
온갖 시중 다 들면서도 싫은 내색 없이 웃어 주는 올케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묵묵히 사랑의 손길로 도와주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들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가족들 모두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홀로 빈방에 누워 기도하는 일뿐.
아버지가 온전히 완쾌되어 하루 빨리 퇴원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