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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눈물로 키운 내 딸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73)

2011-04-16 09:39

오남매의 맏딸로, 입 하나 덜겠다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내진 식모살이 집이 미장원 원장님 댁이었다.
집안일과 미장원 잡일까지 모두 내 차지여서 고달팠지만 내 부지런함과 눈썰미를 좋게 보신 원장님은 내게도 미용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얼마 뒤부터 나는 정식으로 미용 일만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야학에 나갔다가 봉사활동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짝사랑에 애태우며 열심히 다니다가 그가 군대에 가 버리자 공부도 시들해졌는데,
포기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그의 편지를 받으면서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첫 휴가 나온 그와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고, 그가 제대한 뒤 결혼을 했다.
엄청난 학력 차이로 시댁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미 첫아들을 낳은 뒤였다.
그는 복학했고 내가 생계를 꾸렸다.
남편이 취직한 뒤에도 나는 미장원을 그만두지 않았다.
돈 벌겠다는 욕심에 새벽부터 밤늦도록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다.
다행히 손님이 많아 살림도 윤택해지고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시부모님도 좋아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편이 월급을 가져오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다방 아가씨와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여자는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
너무 분해 이혼을 결심했으나 자식 잘못 키운 당신들 죄라며 울며 매달리시는 시부모님과 아이들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여자에게 돈을 주었더니 딸을 낳고 사라져 버렸다.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으랴 싶어 딸을 호적에 올리고 훗날 딸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까 봐 이사를 하고 나니 남편도 마음을 잡아 착실해졌다.

그러나 딸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학교에서 한 혈액형 검사로 자신이 친딸이 아님을 알아 버렸다.
그때부터 착하기만 했던 딸애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모를 찾겠다고 가출을 밥먹듯이 하고 술, 담배, 본드 등 나쁜 짓을 하며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툭하면 미장원에서 돈을 훔쳐 가출하고, 나는 그 애를 찾아다니느라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아빠에게 왜 생모랑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며 덤벼들던 아이는 생모에게서 왜 자기를 빼앗았냐고 내게도 난리를 쳤다.
매도 설득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야단치면 살림살이를 집어던지고 유리창을 깨는 등 난동을 부렸다.
결국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을 못 채우고 퇴학당했다.

그날도 고달픈 몸과 마음으로 간신히 퍼머를 말고 있었다.
좀 어지럽다 싶었는데 깨어 보니 응급실이었다.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는데, 온갖 검사 끝에 나온 병명은 악성 뇌종양이었다.

아! 이렇게 가는 거구나.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식구들에게 유서를 썼다.
특히 가여운 딸애를 너무 미워하지 말고 거두어 달라고, 절대 모른 체 말고 생모를 찾아 주라고 거듭 당부했다.
사실 식구들은 딸애의 행악에 지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나 역시 딸애가 미울 때가 많았지만 불쌍한 마음이 더 컸다.
남편은 자기 탓이라며 휴직하고 내 병간호에 매달렸다.
반 년이 넘는 병원생활 끝에 퇴원했으나 후유증으로 수전증이 심했고 말도 어눌해졌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말과 다른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느 날 눈앞이 뿌예지더니 급기야 왼쪽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백내장이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다시 눈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은 회복되지 않아 바느질, 가위질 같은 손놀림은 못하게 되었다.
날마다 약 기운에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그 무렵 딸애는 가끔씩 병원에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바람처럼 가 버리고,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내 속을 까맣게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딸 아이가 돌아왔다.
초췌한 몰골이었다.
딸은 나를 부둥켜안고 한참 목놓아 울기만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애를 안아 주었다.
그때부터 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병원에서 살다시피하며 내 병간호를 했다.
퇴원 뒤에도 살림이며 나를 챙기는 일을 묵묵히 해냈다.
딸애가 마음을 털어 놓은 건 한참 뒤였다.

딸애는 기어이 생모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이은 결혼에 실패하고 돈 많은 남자의 후처가 되어 살고 있던 생모는 딸을 반기기는커녕 귀찮아했단다.
자신을 낳은 기억조차 얼른 해내지 못하며 실수였다고 억울해하는 생모에게서 딸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때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생모에게서 받은 내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헤아렸다고 했다.
그리고 내 곁으로, 엄마 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 내 반평생을 바친 미장원은 딸이 맡아 하고 있다.
나를 간호하는 틈틈이 미용기술을 배웠는데, 내 친딸처럼 손재주도 닮았다.
게다가 사업수완도 있는지 미장원엔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 나에게서 떠나 버렸던 행복이 다시 찾아오려나 보다.
건강이라는 소중한 재산을 잃었지만 내 소원대로 딸애를 제대로 키워 짝지어 보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참 기쁘다.
역시 인생이란 새옹지마이고 고통의 바다를 지나면 행복의 시간에 다다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