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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한 여자 , 두 남자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12)

2011-04-20 10:30

 
1973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부터 내겐 시동생과 함께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장남과 차남이 세상을 떠난 뒤라 셋째인 남편이 동생들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동생은 그때 이미 직업도 취미도 소일거리마저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하다 일어난 사고로 지병인 간질을 앓게 된 시동생은 가족들의 맹목적인 보호 아래
성격은 비뚤어지고 오로지 자신만 아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무시 당하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시동생은 봄만 되면 가출을 했다.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다가 쓰러져 이곳저곳 파출소와 병원으로 그를 찾으러 다녀야 했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까지 신생아를 돌보듯 일일이 챙겨 줘야 했다.
그 즈음 나는 내 인생에는 남편 외에 한 남자가 더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자라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집과 가까운 곳에 시동생이 지낼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딸 시집 보내는 엄마처럼 옷장, 이부자리 등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그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말이 독립이지 모든 것을 형과 형수가 해결해 주는 종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즈음 시동생은 술로써 삶의 위안을 찾았고, 지병이 있는 그에게 술은 독약이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늦가을 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동생이 술을 마시고 무단횡단하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라고 했다.
중상을 입은 시동생은 연이은 뇌수술로 의식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이내 기억과 감각의 끈을 놓고 말았다.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간병인을 두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의사는 정상적인 회복은 기대할 수 없지만 잘 간호하면 평균수명은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없는 삶이 온전한 삶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산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일, 나는 큰 결단을 내리고 시동생을 간병하기로 작정했다.
날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중환자실로 옮기면서 기도했다.

"제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난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시동생은 모든 감각을 잃고 아침이면 오줌에 절은 눅눅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커튼을 친 뒤 시동생의 옷을 벗기고 얼굴을 씻기고 면도를 하고 온몸을 닦아 내고 기저귀를 갈고… `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설사와 변비가 번갈아 오는 시동생의 손톱 사이에 끼어 있는 변을 칫솔로 닦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정말 내 마지막 인내심마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이게 지옥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시동생에게는 두 살 위의 같이 늙어 가는 형수뿐 아무도 없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남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사람 같았다.
혈육의 고통으로 나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 그를 한순간 이해하다가도
나를 지치게 하는 시동생의 감정 없는 눈을 보노라면 내 고통과 울분은 여지없이 남편에게로 꽂혔다.
그때 난 다정한 말 한마디가 너무도 절실했지만 남편은 입을 꾹 다물 었다.
엄청난 현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남편이 미웠다.

아,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도 변질될 수 있구나.
인생에 대한 회의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내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2년의 세월이 흐른 뒤, 평균 수명을 살 거라는 시동생은 패혈증으로 한 많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 운명의 순간에 바위 같던 남편이 동생의 차가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세상 사는 동안 고생만 했구나. 저 세상에 가서는 건강하게 태어나 행복하거라.”
남편도 시동생도 나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나약하기만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시동생은 갔지만 그는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려놓았다.
그의 장례가 끝나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과제도 끝나고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그제야 내 손을 잡으며 “당신, 정말 고생 많았다”고 애정 어린 말을 했다.

시동생은 내게 많은 것을 주고 갔다.
그가 살아생전에도 나는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시동생은 우리집에 오는 모든 액운을 몸으로 막는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랬다. 우리집은 시동생이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아이들 모두 탈없이 건강하게 자라 주었고 당시 중학생이던 늦둥이 아들은 일찍 철들어
늘 엄마사랑이 부족할 텐데도 불만은커녕 엄마를 위로하는 든든한 청년으로 자랐다.
내 힘들었던 삶이 자양분으로 녹아 아이들 성장의 토양에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천연의 비료가 되기라도 한 걸까.

한 달 뒤면 시동생 3주기다.
남편과 나는 서글서글한 눈매의 시동생 영정을 들고 그의 안식처를 찾아갈 것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다하는 날 어디에선가 시동생을 만난다면 그는
“형수요, 그 동안 어찌 지냈능기요” 하며 따뜻하게 내 손을 잡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