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땅 한 뙈기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던 우리집 형편에,
더구나 밑으로 남동생이 줄줄이 셋이나 되는 가난한 집 큰딸이 대학에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에서 줄곧 상위권이었고 학력고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은 나를 위해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와 상담한 뒤,
나는 다행히 교육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강의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 때도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스란히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경기도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비포장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간 화성군 화수 초등학교.
거기에서 처음 만난 3학년 우리 반 아이들, 순수한 시골마을의 천사들과 마주하면서 나는 참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과 정을 주려 애썼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보람을 느꼈습니다.
한 학년이 두 반뿐인 작은 학교, 마을에 회갑이나 생일잔치가 있는 날엔 교직원 모두가 초대되었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마을 사람들과 가족 같은 두터운 정을 쌓았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한 지 2년, 1988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전라도에 사는 이모집에 놀러 가 사흘을 푹 쉬고 돌아오는 날 아침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 바로 뒤에 앉았는데, 버스는 속력을 내며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3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앞에서 커다란 트럭이 시야를 가리더니 "꽝" 소리와 함께 나는 아득한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 뒤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내가 의식불명으로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차가 부딪치면서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둘 만큼 큰 사고였는데
나는 머리에 멍이 들고 물이 찬 상태로 6개월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손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혀는 굳어 있었습니다.
전신마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다시 까무라치고 말았습니다.
내가 깨어나자 가족들은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듣는 것뿐, 가족들의 온갖 위로에도 저는 대답 대신 울기만 했습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 동료들, 우리 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찾아왔을 때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재활치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 가망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죽고만 싶었습니다.
내 힘으로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고통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죽는 게 나았습니다.
1년을 보류하던 내 사표도 처리되었고 내 희망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보다도 더 못한 존재가 되어갔고, 엄마 또한 모든 일을 접고 갓난아기 같은 딸 옆에서 대소변을 받아 내며 나 몰래 눈물을 삼켰습니다.
병원에서 지낸 지 2년이 지나자, 말도 어눌하게 하고 왼손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퇴원한 뒤 재활치료를 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저를 부둥켜안았습니다.
삭정이같이 작아져만 가는 엄마, 불쌍한 엄마를 보면서 나는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좋다는 약이며 침을 맞고,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내 살을 때려 가며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면서 몸은 멍들고 상처가 끊일 날이 없었지만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 아픔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록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초연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인연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고 건강한 아이도 낳았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만 생각했던 고통과 절망도 이제는 모든 것이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때론 감사하는 마음마저 생겼습니다.
지금 내 나이 서른여덟, 건강도 좋아졌고 말도 제법 또렷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른발 감각이 둔하고 손을 잘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어릴 적 꿈인 초등학교 선생님, 단 2년 동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된 그 꿈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내 몸이 온전해지는 그날을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첫해 가르쳤던 아이들은 의젓한 성인이 되어 지금도 편지를 보내 오고, 또 먼 곳까지 찾아와 힘이 되어 줍니다.
의사선생님은 이대로만 가면 몸이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나를 위로하는 헛된 말일지언정 나는 꿈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건강을 되찾는 날, 다시 교단에 서서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과 마주하며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습니다.
절망에서 빚어 올린 희망의 빛마저 전해 주고 싶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더욱 겸손하고 더욱 감사하고 헛된 욕심을 버리며 진실하게 살아가렵니다.
서른아홉이 되고, 마흔이 되고….
점점 나이가 들어 가겠지만 언젠가는 교단에 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