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한창 어울릴 철부지 나이, 멋모르고 시집을 와 그 해 첫딸을 낳았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남편은 퇴근해 집에 오면 아이랑 잘 놀아 주고 청소도 도와주는 등 나를 잘 배려했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첫돌이 지나면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난감은 쳐다보지도 않고 병뚜껑, 세제, 화장품 등 다른 물건들만 일렬로 죽 늘어놓고 노는 거였다.
한 가지에 집착을 보이면 아무리 불러도 쳐다보지 않았고 두 돌이 지나도록 말귀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갔더니 "자폐증"이라고 했다.
나는 자폐증이 무엇인지 처음 듣는 말이었고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 이상이 있나 뇌파검사, 심전도 검사 등 여러 검사를 해봤지만 다른 이상은 없었다.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눈물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특수학원을 알아보았고, 수소문 끝에 신림동에 있는 특수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자폐아를 키우는 것이 나 혼자 겪는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위안과 힘을 얻었다.
날마다 집에서 학원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고,
누가 껌을 씹고 있으면 그걸 빼내려 손가락으로 남의 입을 쑤시는가 하면,
억지로 과자를 뺏어 먹는 등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그래도 경과가 좋아져서 집 근처 유치원으로 옮기면 좀 편하겠지 하는 기대로 힘든 줄 몰랐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비싼 교육비도 문제였지만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언제까지 가야 하나, 나 스스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채 서서히 지쳐 갔다.
신경질만 늘었고 차츰 남편과의 사이도 벌어졌다.
아이가 성치 않은 것을 서로의 탓이라고 싸우다가 살림살이가 부서지고 언어폭력에, 나중에 남편은 내게 손찌검까지 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정상적인 자식이 없어서 그런가 싶어 둘째를 안겨 주면 예전 모습을 찾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 큰애를 닮을까 봐 불안했다.
아닐 거라는 마음과 그럴지 모른다는 두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병원에서 자폐는 유전이 아니라는 말에 힘을 얻어 둘째를 낳았다.
남편이 아들을 안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나 역시 안도감에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돌이 지나면서 둘째가 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큰아이를 보고 자라선가 싶어 하루 세 시간씩 1년 동안 놀이방에 보냈지만,
불러도 쳐다보지 않고 말귀도 알아듣지 못해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둘째아이마저 자폐증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똑같은 장애를 가진 자식을 주었을까, 신이 원망스러웠다.
다섯 살 큰아이는 눈만 뜨면 냉장고에, 텔레비전 위에 올라가 앉아 있고 책을 일렬로 늘어놓고 도망가고… 잠시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작은애를 보며 위안을 받았는데 이젠 그 희망마저 없어졌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틈만 나면 쉽게 죽는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퇴근해 집에 오면 피곤하다고 잠만 자니, 모든 일을 나 혼자 발버둥치며 뒤치닥거리를 해야 했다.
그러다 지쳐 깜빡 잠들었다 깨어 보면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온 동네를 찾아다니고 있을 때 큰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행인이 보고 데려왔다고 파출소에서 연락이 온다.
그래 옆집 아주머니한테 큰애를 맡기고 급히 달려가 보면 아이는 어디서 무얼 했는지 얼굴과 손, 옷이 시커먼 채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면 이번엔 큰아이가 뛰쳐나가고 없다.
몸이 둘이라도 혼자 당해 낼 수 없다 싶어 아예 문을 안에서 못 열도록 조치를 취하고 나니
아이는 제 맘대로 하질 못한다고 나를 꼬집어서 팔뚝이 시퍼렇게 멍들기 일쑤였다.
꼬집은 데를 또 꼬집어 상처는 마를 날이 없고, 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사람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했지만 말로 꾸짖어 고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우리 아이처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또 금방 좋아지는 게 아니라서 안타까운 순간도 많다.
하지만 때때로 아이는 나를 기쁘게도, 깜짝 놀라게도 한다.
요즘은 영어공부에 푹 빠져 하루 종일 아는 영어 단어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십자수도 잘하고 그림도 곧잘 그린다.
늘 혼자 놀려고 해 사회성이 부족한 것만 마음에 걸릴 뿐.
이제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고 나니 우리 애들이 예쁘기만 하다.
이런 아이를 둘씩이나 신이 내게 맡겨 주신 의미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련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