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홍천 읍내에서 알아 주는 부자였던 우리집 가세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기울더니 제가 열 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우리 오남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저는 큰집에 보내졌지요.
그때부터 큰집에서 보낸 4년 동안의 기억이라고는 형제들과 부모님을 참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내게 30여 년 전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게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올해로 열네 살 된 조카가 있습니다.
4년 전 조카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게 되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경기로 온 나라가 어렵던 1998년 여름, 형님 내외는 춘천 친구 집에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술을 조금 마시고 빗길을 달리던 형님이 그만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차량과 정면충돌했던 것입니다.
“작은아버지! 나는 이제 어디서 살아요?”
형수를 산에 묻고 돌아오던 길에 조카가 물었습니다.
눈망울에는 아직은 부모 품이 그리운 열 살 응석받이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나는 조카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홀로 장남 역할을 도맡아야 했던 어린 시절 회한이 조카의 말 한마디에 서러움의 눈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조그만 개인 회사에 월급쟁이로 다니면서 넉넉지 못한 형님네였던지라
그나마 있던 전세 보증금 천만 원은 교통사고 합의금으로,
저축해 두었던 5백만 원은 형님 입원비로,
장례비용은 급전을 빌려 치렀습니다.
우리 형제의 빈곤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때만큼 한스럽던 때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원망스럽고 엄청난 짐을 안겨 준 형님 부부가 왜 또 그렇게 밉던지요.
"미워하지 말자. 미워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며 대충 형님네 집을 정리하고 나니
조카에게는 옷가지 몇 벌과 교과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조카를 데리고 태백으로 오는 차에서 내 두 아들까지 아이 셋을 키워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책무와
넉넉지 못한 살림에 또 하나의 짐을 지게 된 아내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옛날 내 더부살이의 환영을 재현하는 듯한 소리 없는 아픔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조카를 볼 때마다 옷가지며 먹는 것, 학교 등 모든 것이 초라한 것 같았고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짜증으로 이어지면서 부부싸움도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더부살이 동안 업신여김 당하고 손가락질 받으며 울던 나를 떠올리며 조카에게만은 따뜻하게 대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마주하면 돌이키고 싶지 않은 나의 전철을 밟아 가는 조카가 마치 나인 듯해
차마 보듬어 주지도 못하고 나도 모르게 차갑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매서운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서는데,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을 깨울까 봐 신음처럼 들려오는 울음소리….
거실 한쪽을 막아 억지로 만들어 꾸며 준 방에서 조카는 숨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왜?” 라고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가가서 위로하고 쓸어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껏 나는 작은아버지도,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닌, 어린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고도 슬픈 인간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 냉소와 무관심으로 조카를 대하던 나는 변해 갔습니다.
나를 잡고 있던 슬픈 기억들을 이겨 내고, 아이의 작은아버지로 다시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던가요?
2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카는 나름대로 적응해 나갔고 잘 커 주었습니다.
1년이면 족하리라던 형님은 그 시간을 훌쩍 넘긴 4년 뒤 올여름에야 퇴원을 했습니다.
숱한 고통을 이기고 다시 "부자(父子)"로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그들이 태백을 떠나 새로운 둥지로 가던 날, "아! 더 잘해 줄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조카를 앉혀 놓고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열심히 살라고 숱하게 나무라던 그날들을 돌아보니
아마도 나에게로 향하는 채찍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염원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세대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 더 높은 세상으로 비상하는 그런 네가 되어야지.
그래 이제는 사랑하는 아버지 밑에서 네 맘껏 느끼고 누리려무나."
그렇게 30년을 뛰어넘은 내 생애 두번째 더부살이의 아픔은 조카의 귀향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물었습니다.
지금, 가고 없는 조카의 빈자리 속에서 커 가는 건 조카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고
한층 성숙한 중년의 남자가 되어 가는 내 자신입니다.
“내 사랑하는 조카 윤아! 건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