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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제 몫의 자리가 꼭 있을 겁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3)

2011-05-04 08:34


저는 1남 5녀 가운데 맏딸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꿈을 꾸셨는데,
양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흙비에 꼼짝도 못하고 그 비를 다 맞았답니다.
그 꿈 때문일까요?
제 삶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다섯 살 되던 해 그 첫 징조가 시작되었지요.
저와 남동생이 "마마"라고 하는 천연두를 함께 앓았는데,
일주일을 시름시름 앓다 결국 9개월 된 남동생은 먼 길을 떠났고 저는 목숨은 구했지만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았습니다.

남동생 대신 제가 살아남은 것 같아 제 가슴에는 늘 그늘이 져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너라도 살아 천만다행이라고 하셨지만,
죽은 동생을 차마 묻지 못하고 포대기로 싸서 며칠이나 방 윗목에 놓아두었습니다.
행여 기적이라도 일어나 다시 숨이 돌아오지 않을까 자꾸만 포대기를 들춰 보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천연두를 앓은 뒤 저는 점점 몸이 약해졌고, 잦은 기침에 폐가 망가져 요양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식구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길고 외로운 생활은 20여 년이나 계속되었고, 그러는 사이 동생들은 하나 둘 결혼을 했습니다.

서른다섯,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판정을 받던 날 참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하지만 막상 세상으로 나와 보니 약한 몸으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요양소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고독하고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 끝에 요양소에서 만났던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둘 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던 터라 국가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에다 양가 부모님께 생활비를 타 쓰며 최저 생계를 유지했지요.
그래도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남편과 나는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도대체 왜 싸우고 미워하고 힘들어하는지 말입니다.
저희들의 삶은 한없이 허약해진 육체와 틈만 나면 그 육체를 파고드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불길했던 꿈이 또 한 번 제 인생을 흔들었습니다.
아이가 생겼던 것입니다.
서른아홉에 가진 첫아이.
하지만 의사선생님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숨 쉬기도 힘든 사람이 어쩌려고 아이를 가졌냐며 낳기도 전에 아이와 산모 모두 생명을 잃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지우던 날, 내 자신이 아무 자격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망한 눈물이 흐르더군요.
착한 딸이 되지 못했고, 좋은 큰언니가 되지 못했으며, 좋은 엄마도 될 수 없었으니….

5년 뒤, 남편마저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저를 만난 뒤 건강해지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결국 마흔여섯 해 짧은 삶을 접었습니다.
내 손을 꼭 붙들고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내가 먼저 가서 다행이다”였습니다.
그는 자기만 세상에 남겨 두고 제가 먼저 떠날까 봐 늘 불안해했거든요.
신은 그에게 딱 한 가지 소원만 허락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친정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열일곱 나이에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 와 어린 아들 앞세우고, 결
국 대를 잇지 못해 늘 죄인처럼 사셨으며,
시동생과 시누 뒷바라지에 시어머님 봉양, 온갖 농사일에 밤에는 길쌈으로 고단하기만 한 삶이셨습니다.
거기에 늘 가시처럼 아픈 큰딸까지….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저는 어머니 가슴에 대못만 박은 것이지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유난히 잘생기고 귀여웠던 어린 남동생을 잃었고,
제 분에 넘치는 소망을 가졌던 죄로 아이를 잃었고,
저를 누구보다 위해 주던 남편을 먼저 보냈고,
그리고 하늘 같던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너무 많은 아픔을 겪어서일까요?
아니면 약하디 약한 몸이 이젠 한계에 다다른 걸까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그저 밥해 먹고 텔레비전 보고,
달랑 제 방 한 칸 청소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임에도 1년에도 몇 번씩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며 가족들을 긴장시켰지요.

저는 지금 어머니의 유언대로 동생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동생은 저를 엄마 대하듯 극진하게 대하고, 제부는 생활의 초점을 못난 처형에게 맞춰 줍니다.
열 살 난 조카는 이모 준다고 바자회 때 옷이랑 신발, 모자까지 한 보따리 사 왔는데
일년 동안 모은 용돈을 모두 털었다고 해 저는 또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가끔 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곤 합니다.
의사 말대로 열심히 숨 쉬기 운동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신은 왜 내게 이렇게도 모진 삶을 주셨을까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순간이 더 많습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저를 위해 애쓰는 동생네 식구들이 있어 행복하니까요.
그리고 몸이 조금 더 나아지면 세상에 저를 보낸 신의 뜻대로 제 몫의 자리를 찾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