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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아버지의 광부 인생 30년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7)

2011-05-05 11:39

“아빠, 다음에 또 올게요. 담배 좀 피우지 마시고요. 건강하셔야 해요.”


찾아뵐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작은딸의 잔소리 섞인 인사를 받으며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아껴 두었던 당신 용돈을 꺼내 다 큰 딸 손에 쥐어 주신다.
아무리 싫다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눈물을 감추며 돈을 받고 병원 문을 나선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시골 자그마한 병원에서의 작별 인사.
그러나 그때마다 밀려오는 가슴 저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낯설기만 하다.

내 고향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이다.
옛날 시커먼 탄가루 두텁게 내려앉은 탄광촌 대신 지금은 호화찬란한 카지노가 주인 노릇하는 ….
시커먼 탄가루, 어쩌면 그 탄가루가 지금까지 나를 길러 준 것인지도 모른다.

탄광에서 일하면 한몫 챙길 수 있다는 소문에 떠밀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고한으로 오셨다.
처음에는 딱 몇 년만 있기로 작정하고 일을 시작하셨지만, 생각처럼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셨다.
소문으로 돌던 "한몫"은 해가 거듭될수록 멀어져만 갔고, 딱히 다른 할 만한 일도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루다 30여 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어릴 적 아버지는 "오늘 막장에서 누가 다쳤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고, 이른 아침 종종 구급차 사이렌이 온 동네를 울렸다.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하셨지만 철부지였던 나는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삼남매는 아버지 폐에 탄가루가 쌓이고 숨이 가빠지는 속도와 비례해 성장해 갔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일하던 갱이 무너지면서 허리를 다치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원생활은 시작되었다.
몇 달 뒤 퇴원한 아버지는 다시 탄광일을 시작하셨다.
가래 때문에 숨쉴 때마다 쌕쌕 소리가 났고,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숨이 넘어갈 듯 고통에 찬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삼남매를 위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탄광에 다시 나가시고 얼마 뒤, 밤에 일을 나간 아버지가 다음날 점심 때가 지나서도 오지 않으셨다.
엄마가 걱정하며 나가셨는데 저녁 무렵 아버지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오셨다.
막장이 또무너져 탄더미 속에 반나절 이상 갇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의식이 희미해질 때마다 자꾸만 자식들 얼굴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우리들을 다시 만났다며 아버지는 삼남매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동안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기 싫으셨는지
우리들이 가면 공부는 않고 왜 왔냐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
그러면서도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우리에게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어김없이 쥐어 주셨다.
난 그 맛에 병원을 열심히 들락거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철없던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수술을 받으셨다.

“네 아빠 불쌍해서 어떡하니?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안 해도 될 수술을 받고….
수술은 이제 싫다고 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흑흑 ….”

하지 않아도 되는 수술을, 보상금을 받아 자식들 뒷바라지하려고 결심하신 것이었다.
언니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어이 허리에 쇠를 박으신 아버지.
어머니라도 건강하면 좋으련만 심장이 좋지 않아 한 달에 한 번씩 원주 큰 병원에 가 약을 타 오는 어머니가 일을 하시기는 무리였다.

수술을 받은 몇 달 뒤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받고 퇴원하셨다.
가래 끓는 숨소리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집으로 오니 좋다고 하셨다.
그러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것이다.
아버지는 한동안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 저 둘째예요. 모르시겠어요?”

“아주머니 누구세요? 우리 딸이라고요? 요 앞에 식당 가면 밥 맛있게 하는 식당 있어. 어여 가 먹어!”

누군지도 모르면서 당신 딸이라는 말에 제일 먼저 자식 배곯을까 걱정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 가족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아버지는 빠르게 회복해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좋아지셨다.

그 이듬해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신부 입장할 때 지팡이를 짚고 나갈 수는 없다며 한숨을 쉬셨다.
결혼식날, 아버지는 지팡이를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 아주 힘겨운 걸음으로 언니 손을 붙들고 천천히 입장하셨다.
딸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고통을 웃음으로 참아 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진폐로 또다시 입원해 계신 아버지.
광부 인생 30년은 그렇게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음을 잃지 않으신다.
아직 초등학생인 막내동생을 다 키울 때까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으시리라는 약속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