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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우리 네 식구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4)

2011-05-06 09:46


지금 제 옆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소중한 아내와 천사 같은 두 아이.
네 식구가 발을 편히 뻗기에도 좁은 방이지만 이 행복을 누리기까지 아주 먼 길을 돌아와야 했기에
제몫의 잠자리로 남은 작은 공간이 한없이 넓게만 느껴집니다.

아내와 저는 사촌누님이 경영하는 봉제공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 공장에서 십 년째 기계자수를 놓는 직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보다 네 살 위인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내 또한 저를 막내동생 대하듯 했으니까요.

그 무렵 삼수를 하고도 대학 진학에 실패한 저는 명문대 출신 두 형과 늘 비교되었고
자격지심에 부모님 눈빛도 전에 없이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그 탓인지 자꾸만 집 밖으로 만도는 저를 그녀는 엄마처럼 누나처럼 감싸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외모와 가난하고 병든 아버지에 국졸 학력, 세상 잣대로 보자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녀였지만
늘 웃는 따스함이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피하기만 하던 그녀도 제 끝없는 구애에 마음을 돌렸지요.

하지만 대학교수 아버지와 중학교 교감이신 어머니가 봉제공장 여공을 막내며느리로 맞을 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부모님 허락 없이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지요.
웨딩드레스 대신 하얀 원피스를 입고 결혼식 내내 흐느끼는 아내를 달래며 언젠가는 부모님 앞에 떳떳이 나서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축복받지 못하는 부모의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우리 부부는 용기를 내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대문조차 열어 주지 않으셨지요.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백일이 지나도록 엄마아빠와 눈도 맞추지 않았고, 옹알이며 뒤집기도 좀체 할 줄 몰랐습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사는 데 쫓겨 조금 늦되려니 하며 넘겨 버렸습니다.
아내와 저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전국으로 이불 행상을 다니느라 주말에야 겨우 아이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돌 즈음, 아이가 마비 증세까지 보이기에 그제야 병원을 찾았는데, 뇌성마비에 자폐증세까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돈 번다고 아이를 내팽개쳐 두어 그리 된 것 같은 죄책감에 괴로웠습니다.
그때부터 아내는 아이 재활치료에만 매달렸고, 저 혼자 이불 행상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삼 년, 지하 단칸방을 벗어나 전셋집으로 옮겼습니다.
내 집을 산 것도 아닌데 아내는 이사하던 날 벽을 손바닥으로 몇 번씩 쓸어 보고 바닥을 반질반질하도록 닦으며 뿌듯해했습니다.
그 즈음 특수재활치료를 받아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아이 때문에 고민하던 우리 부부는
큰애가 부모 없는 세상에서 기대어 살 수 있도록 형제를 낳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큰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임신중에 아내가 간암 2기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의사는 생명이 위험하다며 임신중절을 하라 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습니다.
8개월째에 이르러서야 아내는 2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여자아이를 수술로 분만했습니다.
아기는 바로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고, 아내의 투병생활도 시작되었습니다.

병이 낫는 길은 간 이식뿐이었는데, 아내의 혈육이라고는 중풍을 앓는 장인어른과 오래전 집을 나간 남동생이 전부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두 아이를 사촌누님 공장 한 켠 작은 방에 남겨 둔 채 사진 한 장 들고 처남을 찾아나섰습니다.
한 달여 뒤 수소문 끝에 서울 한 당구장에서 말로만 듣던 처남을 찾았지만,
처남은 그 자리에서 누나에게 간을 떼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처남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사정한 끝에야 간신히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 천만다행으로 조직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치료비가 문제였습니다.

망설인 끝에 결혼 5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가 도와 달라 무릎을 꿇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끝까지 제 얼굴은 외면하면서도
뒤돌아 나오는 제 외투 주머니에 수술비가 담긴 봉투를 넣어 주셨습니다.

아내의 수술은 성공이었고, 지금은 많이 좋아져 퇴원해 일주일에 한 번 통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께 아직 아들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지하 사글셋방에서 다시 시작하는 형편이지만 저는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서툰 발음으로 “아아∼빠!”라며 안기는 아들이 있고 건강한 딸아이, 그리고 예전의 따스한 웃음을 되찾은 아내가 있으니까요.
뇌성마비를 앓는 큰아이는 제게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아들입니다.
아들의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저는 살아갈 힘을 얻고 오늘도 낡은 트럭에 이불을 가득 실은 채 열심히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