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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못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습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81)

2011-05-07 08:31


저는 1남 5녀 가운데 막내로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5년 뒤 아버지마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우리 육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만 충남 홍성으로 시집가는 큰누님을 따라갔지요.
큰누님은 시어머니 구박 속에서도 저를 초등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 덕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누님이 고생하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3학년 때 중퇴하고 고모 댁이 있는 온양으로 가 이발소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에서 손님들 머리 감기는 일을 했는데,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유난히 작은 키에 손도 작았던 저는
손가락에 힘이 없다고 타박받다 열흘을 못 넘기고 쫓겨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홍성 누님집에 왔는데,
누님은 심부름하며 밥이라도 편히 얻어먹으라고 저를 장터 술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때 저를 남겨 두고 뒤돌아 가시던 누님의 모습은 지금도 눈물로 아롱져 남아 있습니다.

술집에서 지낸 2년 동안 어린 나이에 보지 못할 것도 많이 보았지요.
그러다 동네 아저씨가 가게에 오셨다가 저를 보고는 애 있을 곳이 못 된다며 다시 누님 댁으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제야 매형은 자신이 다니던 연탄공장에 일자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연탄을 나르고 늦은 밤에는 과자 배달을 하며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성실하다는 소문이 나자 딸만 있는 집에서 저를 양자로 데려갔습니다.
그 집은 폐타이어로 자동차 밧줄이며 고무 두레박, 거름통을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일이 무척 고되었지만, 양부모님은 일한 만큼 꼬박꼬박 월급을 주셨습니다.
그 돈을 고스란히 큰누님께 드렸는데, 적은 돈이었지만 누님은 정말 고마워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1978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간 곳이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조그만 철공소였습니다.
남들보다 재주가 좋고 손놀림이 빨라 제법 빨리 기술을 익히면서, 남몰래 내 사업에 대한 꿈을 품었지요.

7년 뒤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내는 의지할 데 없는 제게 많은 용기와 격려가 되어 주었습니다.
3년 뒤 제가 공장을 차려 보고 싶다고 하자 아내는 5백만 원이 든 통장을 내놓았습니다.
생활비로도 빠듯한 월급을 쪼개 저축을 했던 것입니다.

그 돈으로 "삼군기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작지만 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제 성실함을 알아준 여러 지인들 덕분에 공장은 날로 번창했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믿었던 친구가 악덕업자와 짜고 제게 발행해 준 당좌수표와 어음 2억 5천만 원이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알뜰한 아내가 모은 피 같은 5백만 원으로 시작한 공장이 6년 만에 망하고 나니 느는 것은 술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술에 빠져 보내기를 1년, 다시 용기를 내어 재기의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1년 동안 복역하고 나오니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막노동을 해 가족의 생계를 꾸렸지요.

하지만 아이들도 점점 크다 보니 먹고 살기가 힘에 부쳐 얼마 뒤 할부로 중고화물차를 사서 중고 가전제품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주택가 골목을 다니며 “고장난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세탁기를 삽니다!” 하고 외치면
집집마다 고장난 물건을 많이 가지고 나오는데 마음씨 좋은 분은 고맙게도 거저 주시기도 했지요.

이제 시련은 다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1년 5월, 젊은 남녀가 마침 중고 가전제품이 필요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텔레비전과 세탁기, 비디오를 사고 35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 돈 가운데 10만 원짜리 수표가 있었는데 하필 도난수표였던 것입니다.
그저 믿고 수표에 이서도 받아 놓지 않았던 터라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은 "강도상해죄"라는 죄명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한순간 이윤을 좀 더 남겨 보겠다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판 죄치고는 너무나도 엄청난 벌인 듯해 원통합니다.
또 관절염을 앓는 몸으로 홀로 두 자식을 키우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몸이 아파 면회 한 번 오지 못하는 아내의 심정은 또 얼마나 비통하고 억울할까요.

하지만 저는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치료비가 없어 제때 치료도 못 받으면서도 한결같은 믿음으로 못난 저를 기다리는 아내와
하루 빨리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토끼 같은 두 아들이 있으니까요.
올해로 마흔다섯인데 출소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 막막하기도 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성실함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밝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만은 잃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