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갈게요.”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에 일주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엄마의 손을 나는 한동안 놓지 못했다.
황소 같은 어질고 큰 눈을 대답 대신 끔벅거리는 엄마의 눈빛에는 딸을 보내기 싫은 아쉬움이 가득하다.
엄마는 세월이 지났다고 나 때문에 겪었던 가슴앓이를 다 잊으신 걸까?
뒤돌아보면 나는 아직 베인 듯 아릿한데….
42년 전,
1·4후퇴 때 홀홀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서른네 살 젊은 엄마에게 뱃속 막내까지 오골오골한 사 남매와 가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 뒤 엄마는 이웃할머니께 갓난쟁이 막내를 맡기고 새벽에 일을 나가서는 밤늦게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셨다.
이웃들은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이들은 애 없는 집에 주고 재가하라고 입을 모았다.
우연히 그 얘기를 듣게 된 다섯 살 어린 나는 엄마가 도망가면 어떡하나 싶어 밤을 하얗게 지새며 엄마를 지키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엄마는 열심히 남의집 물지게를 져다 날랐고 삯바느질에 청소부, 험한 공사장 일까지 잠시도 일을 놓지 않으셨다.
그런데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엄마의 그런 희생조차 불만스러워졌다.
신문 배달을 하며 용돈을 벌어 쓰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자기 방이 있는 친구가 너무 부러워 잔뜩 우울해져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거지같이 살 바에는 죽는 게 나아.
짐승처럼 먹는 것에만 연연하며 살려면 일찌감치 연탄불 피워 놓고 다 죽자.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걸 왜 낳았어?”
그때 이렇게 키워 미안하다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뒤 내 마음대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 또 한번 엄마 가슴에 못을 박았다.
엄마가 아버지 대신 마음 기대고 살던 언니는 일찍 결혼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버렸고,
엄마는 한동안 당신의 박복함을 한탄하셨다.
막내가 고2 때 엄마는 어느 학원 구내식당에서 주방일을 하셨는데, 연탄 아궁이에 조리를 하다가 5개월 만에 병을 얻으셨다.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쓰러져 눈이 뒤집히고 목과 입이 돌아가는 경련을 일으키셨다.
그 와중에도 막내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취직도 했다.
엄마는 병세가 좀 좋아지자 친구 소개로 미제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껌이며 초콜릿을 들고 나가기 무섭게 세관원들에게 압수당하기 일쑤였다.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모지냐며 우시기를 몇 번, 엄마에게 다시 예전 증상이 찾아 들었다.
그제야 병원을 찾아 특수촬영을 해보니 엄마 머릿속에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덩어리가 보였다.
아마도 그간의 고단한 삶이 만든 것이었으리라.
다행히 그 혹은 수술로 말끔히 떼어 낼 수 있었다.
엄마가 건강을 되찾자 큰동생은 전부터 소망하던 사제의 길로 들어섰고, 나도 충주에 있는 농아학교 보육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집을 떠나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효성 지극한 막내가 엄마 곁에 있어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4년,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다.
시댁이 부산이라 평택 친정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간혹 통화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치매증상이 보였다.
막내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엄마 칠순잔치 때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가 놀라고 말았다.
새카맣게 타 나뒹구는 냄비들, 허기진 세월을 보상받고 싶으셨을까?
다 드시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사 들인 고기와 채소가 냉장고에 가득 차 썩어 갔고, 바닥은 기름때로 찐득거렸다.
살림살이는 구차해도 양은냄비가 반짝일 정도로 깔끔하던 엄마였는데….
눈물과 땀이 범벅되어 닦고 또 닦아 냈지만 나의 불효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너무 살이 쪘고 대소변조차 못 가렸다.
마침 로마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휴가를 나왔던 큰동생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미련없이 수도복을 벗었다.
막내는 엄마 건강을 위해 시골로 이사하겠다고 했다.
이사를 하루 앞둔 날 저녁, 막내동생이 입을 열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엄마를 찾아 업고 오면서 몇 번이나 같이 죽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엄마에게 죄지을 뻔했다고,
무거운 몸을 혼자 가누지 못해 등에 욕창이 생긴 엄마가 몇 달 동안 입원해 계실 때 회사 다니랴, 엄마 병수발하랴 정말 힘들었다고,
그래서 누나와 형 원망도 많이 했다고….
“엄마에게는 불효막심한 말이지만 누워 계시니 제가 편하네요”
하며 막내는 쓸쓸히 웃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막내였다.
가난 때문에 그토록 절망하고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불혹을 맞은 막내의 눈빛은 맑기만 하다.
다음날, 새 집을 향해 떠나는 이삿짐 트럭을 보며 나는 기도했다.
"엄마, 혹 하늘나라로 가시더라도 착한 막내아들, 큰아들 행복할 수 있도록 든든히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