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여름 결혼해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첫딸을 낳고 얼마 안 있어 둘째를 임신했다.
출산을 얼마 앞두고 딸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때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갈등은 갈수록 깊어만 갔고, 결국 5년 뒤 시댁 식구들과 얼굴을 붉힌 채 분가해 나와야 했다.
어린 두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맞벌이를 시작했다.
남편은 간판 만드는 일을 했고, 나는 피자가게 주방에서 일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몇 년 뒤 조그마한 가게를 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손을 댄 사업마다 성공하여 32평짜리 아파트도 샀다.
그 사이 두 아들도 얻었다.
그런 우리 가정에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절친한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친구 사업이 잘못되면서 모든 책임이 남편에게로 온 것이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교통사고까지 내는 바람에 보상금도 어마어마하게 내줘야 했다.
그동안 모은 재산이 밑 빠진 독에서 물 흐르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살림살이며 아파트도 경매 처분되고 엄동설한에 거리로 내쫓겼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다섯째 아이를 임신중이었다.
새벽 2시, 아이 넷을 깨워 차에 태우고 목적지도 없이 달렸다.
남편은 교각을 들이받고 강물에 빠져 다 같이 죽을 심산이었고 나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 속력을 막 내기 시작하자 엄마아빠 표정이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큰딸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우리가 커서 돈 많이 벌어 잘살게 해 드리면 안 돼요…?”
그 말에 우리 부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든 열심히 살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났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남편과 나는 말없이 울었다.
가진 것 없고 갈 데 없는 우리를 반겨 준 이는 언니였다.
마침 언니네 가게에 일손이 모자라다며 거기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숨죽여 지내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배가 너무 아파 뱃속 아이가 걱정돼 처음으로 하루 쉬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형부가 "일도 안 하는데 더 이상 못 데리고 있겠다"며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던지듯 주었다.
형부의 태도에 너무 놀라 남편과 나는 무어라 말 한마디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서러운 나머지 애들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래도 난 형부네가 어려울 때 조카들을 데려다 1년 동안 거두었는데, 남편도 싫은 소리 한번 않고 친자식처럼 돌봤는데…."
그날 밤 몇 시간을 거리에서 방황하다 큰오빠 집으로 갔다.
오빠도 처음에는 반겨 주었는데 일주일쯤 지나자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은
“너희들이 원수다. 너희 엄마는 뭐하러 자식을 줄줄이 낳아 이 고생이냐”며 아이들을 구박했다.
누이동생이 가여워 한 말이었겠지만, 아이들 마음에 큰 멍울을 남길 것 같아 다음날 방을 구하러 다녔다.
나는 빌었다.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싼 방을 주세요."
마침내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방을 보증금 없이 월 10만 원에 구했다.
마침 빈 방이라 그날부터 지내게 되었는데, 이불도 없어 바닥에 종이상자를 깔아 아이들을 재웠다.
이튿날 고물상에서 가스렌지 2천 원, 가스통 1만 5천 원, 쌀 만 원어치, 라면 한 상자를 샀다.
반찬이 없어 라면을 끓여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얼마 동안 남편이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해 벌어 오는 돈으로 하루하루 꾸려 갔다.
한편 뱃속 아이는 점점 자랐다.
남편 혼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형편에 네 아이도 버거웠다.
고민 끝에 8개월 된 아이를 지우려고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러나 초음파를 통해 본 아이는 건강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아주 잘생긴 듯했다.
그것을 본 남편이 남 주더라도 낳자고 했다.
이웃 사람들 도움으로 모자보건 센터를 소개받아 4.4kg의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산후 조리는커녕 분유값이라도 벌기 위해 며칠 뒤부터 일터로 나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졌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초등학교 6학년 큰딸이 막내 기저귀도 갈고, 우유도 먹이고, 동생들 밥도 챙겼다.
그 딸을 보면 힘이 나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용기가 솟는다.
지금도 단칸방에 일곱 식구가 누우면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온 식구 다 같이 죽으려던 일, 막내를 지우려고 병원을 찾았던 일이 생각난다.
여기까지 오는데 어둠의 터널이 너무 길어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 모두 아무 탈 없이 자랐지 않은가.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것은 남편의 지혜로운 판단과 큰아이의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형제들 원망하고 남편 친구를 미워했던 마음은 모두 잊었다.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아낀 덕에 작은 채소 가게도 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다섯 아이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기억의 그림자들이 말끔히 지워져 밝고 건강하게 자라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