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도 때문에 못 살겠다.
날마다 술 먹고 싸움이나 하고, 거리에 누워 자고, 훈계하면 대들고, 카드빚도 4백만 원이 넘어 독촉장이 날아오고….
이제 나도 지쳤다.
좀 데려가거라.”
벌써 몇 번째인가?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데 왜 그 애만 비탈길로 들어섰단 말인가!
흥분한 사촌언니의 음성을 가슴에 담고 막내를 불러 넷째가 있는 서울로 향했다.
가슴 깊이 묻어 둔 어린 날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원래부터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집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삶의 의욕을 잃으시면서 더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 맏이인 나는 고1, 둘째 중3, 셋째 중2, 넷째 초등학교 6학년, 다섯째 4학년, 막내가 여섯 살이었다.
할아버지까지 우리 여덟 식구는 꽁보리밥에 멀건 된장국, 그것도 없으면 수제비로 겨우 끼니를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몸져누워만 계시니 그것조차 못 먹을 때가 많았다.
결국 거동도 힘드신 할아버지가 빈 병을 주워다 팔고 등산객들에게 구걸도 해 오셨다.
시장 쓰레기통을 뒤져 팔다 버린 과일이나 채소를 주워 와 여섯 손주들을 먹이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마저 결핵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뒤 나와 여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해야 했다.
공부 잘하던 둘째도 인문고를 포기하고 숙식과 학비를 제공하는 기술학교에 입학했다.
그 무렵에야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고, 막노동 일을 시작하면서 그런 대로 밥은 먹게 되었다.
그런데 여동생과 내가 한 입이라도 덜려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히 동생들에게 마음을 못 썼다.
그때부터였다.
밑으로 두 동생을 책임지던 넷째가 중학교 1학년 때
누구에게도 기댈 길 없던 제 힘든 마음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꼬임에 본드를 흡입했던 것이다.
어린 날의 실수일 뿐이라 여겼던 그 일이 이렇게 넷째를 망칠 줄이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서러움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고 있을 때였다.
“누나, 다 왔어. 저기가 사촌형네 중국집이야.
위험하니까 차 안에 있어.
내가 형을 찾아올게.”
새벽 5시,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넷째를 찾았다.
넷째는 얇은 옷 하나만 걸친 채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자판기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누나, 내가 경찰서에 연락했으니까 형사들이 곧 올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형 이대로 놔두면 폐인이 되어 돌아다니다 객사할지도 몰라.”
각오는 했지만, 너무도 단호한 막내의 말이 조금은 섬뜩했다.
나와 막내는 잠복형사처럼 넷째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떨고 있는 동생….
나는 “병도야, 너 왜 이렇게 됐어” 하며 넷째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이 형사 둘이 도착했고 넷째는 결국 체포되었다.
한참 뒤 경찰서 취조실에서 나온 형사가 말했다.
“저 사람, 여기 배달도 오던 사람인데….
착하고 성실했고요.
근데 오늘 주사로 마약을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러자 막내가 “맞아요. 같이 사는 사촌형과 누나가 주사하는 걸 봤고 주사기도 나왔대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고 그렇게까지 해서 넷째를 경찰서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막내의 말을 가로막았다.
“마약은 아닐 거예요.
어려운 형편에 형, 누나들 대신 집안일과 동생들 돌보느라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들어 뭐에라도 의지해야겠기에
그저 본드 몇 번 했을 뿐이에요.
선처해 주세요.”
평소 동생의 성실함을 알고, 또 내가 애원하자 형사는 주의를 주며 넷째를 풀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다스리고 넷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넷째는 내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어디론가 가 버렸다.
막내 역시 “다 누나 때문이야! 누군 형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이러는 거잖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저 혼자 차를 타고 사라졌다.
황야에 내팽겨쳐진 듯 두 동생을 다 놓치고 허탈한 마음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막내가 넷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애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동생들에게 뛰어갔다.
상처투성이 얼굴에 움푹 패인 두 눈, 알콜중독에라도 걸린 듯 덜덜 떨리는 손….
나는 넷째의 손을 잡고 말없이 울었다.
그동안 동생만 나무라며 나 몰라라 했던 10여 년 세월이 너무나 미안했다.
그렇게 넷째는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요양시설에서 두 달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은 동생은 지금 우리집에서 같이 지낸다.
남편과 같은 직장에 취직도 했다.
동생들이 “얼마 못 버틸 거야. 그냥 정신병원에 보내는 게 낫지 않아?” 하고 말렸지만
나는 비좁은 아파트에서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을 치르는 남편과 아이 속에 동생이 건강하게 있어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상을 앞에 두고 기도하며 맛있게 먹는 동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가족이란 이해와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처로 마음이 헤질 대로 헤진 지금에야 절실히 깨닫는다.
“넷째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