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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10년 뒤의 약속을 꿈꾸며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86)

2011-05-12 13:18

 
내 나이 스물셋에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고를 졸업하고 나간 직장에서 거래처 직원인 그를 만났다.
숫기가 없던 나는 늘 쾌활하게 생활하며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서른 살 그에게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느껴졌다.
주말이면 쿰쿰한 냄새가 나는 그의 자취방을 깨끗이 치우고, 일주일치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돌아오곤 했다.
가난한 그에게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것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았고,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준비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성급하게 미래를 계획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결혼을 한 달여 앞두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에 치이고 말았다.

보름 만에 깨어났을 때, 다리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고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의사는 재활 치료를 해도 걷기 힘들 거라 했고,
한쪽 얼굴이 일그러지는 안면 마비를 막기 위해 몇 차례나 더 수술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는 이 모습으로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다 생각하고 그를 보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걸음마를 가르쳐 주는 아빠처럼 내 두 손을 잡고 한 발짝이라도 걷게 하려고 애를 썼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식도 올리지 못한 채 양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즈음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나 간호하랴 일하랴 정신 없던 남편에게 한 친구가 급히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며 2천만 원 대출 보증을 부탁했다.
가까운 사이인 데다 우리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절친한 친구였기에 남편은 망설임 없이 보증을 섰지만
일주일 뒤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신혼집 전세금을 빼 빚을 갚고 사글세방으로 옮겼다.
더욱이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 볼일을 보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고,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모기와 파리가 들끓어 창문 한번 못 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 보일러가 고장나 얼음 같은 냉방에서 꼭 껴안고 서로의 체온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은 것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나를 위해 집 안의 문턱을 모두 없애고,
내 몸에 맞게 부엌을 손수 고쳐 주는 남편의 사랑 덕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아이가 태어났다.
처음에는 부족하기만 한 나를 엄마라는 존재로 다시 설 수 있게 해 준 아기가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돌보면서 하루하루 지쳐 갔고,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남편은 잠자기에 바빴다.
피곤에 절은 남편의 잠든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리석게도 한결같을 줄 알았던 남편도 결국 다른 남자들과 똑같구나 하고 실망했다.

산후우울증과 나조차 적응하지 못한 내 몸,
제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족한 엄마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의 상태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이튿날 남편이 내 손을 잡고 간 곳은 정신과 병원이었다.
의사는 심한 우울증을 동반한 사고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 뒤 시도 때도 없이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고, 혼자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살기 위해 날마다 한 움큼의 약을 먹으며 입원과 퇴원을 수차례 반복하는 동안 아이는 친정에 맡겨졌다.
나 하나로 인해 집은 엉망이 되어 갔다.

"교통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나 때문에 정신 없이 살지만 않았어도 남편은 돈을 떼이지 않았을 텐데.
과연 내가 10년 뒤 결혼식을 올리자던 남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원망과 절망에 젖어 들었지만 차츰 마음을 다잡아 갔다.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된다.
내가 흔들리면 아이도 남편도 흔들린다.
나는 아내와 엄마라는 두 가지 이름표를 단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의 뒷모습이 아픈 나보다 더 쓸쓸하고 안쓰러웠다.
남편은 힘겹게 일하고 와서 직접 밥을 해 먹고 엉망인 집 안을 치우고 나에게 밥을 떠 먹여 주면서도 단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그저 한결같은 모습으로 기다려 주었을 뿐이다.
나를 떠나 순탄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 행복한 삶을 장애인인 나와 바꾼 남편,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나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준 남편과 아이가 있어 휠체어를 탔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다.
너무 많은 장애물로 내 삶이 조금 더디게 가지만 그만큼 기쁨은 더 크리라.
이젠 10년 뒤 남편과의 약속을 이루는 날을 조심스럽게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