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열네 살 때,
저와 네 명의 어린 동생 그리고 아편에 중독된 아버지를 뒤로한 채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습니다.
어린 동생들은 날마다 엄마를 찾으며 무섭게 울어 댔고,
아버지는 아편의 유혹에서 헤어날 줄 모르셨습니다.
엄마를 잃고 풀 죽어 지내는 동생들을 보다 못해 애원을 해서라도 어머니를 모셔 오려고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였고,
저를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낯설었습니다.
당신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서 어쩌면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는지….
더 큰 절망만 안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듬해 저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아이스케키 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하나에 2원씩 하는 아이스케키를 하루 종일 팔아 손에 들어오는 오륙십 원으로 여섯 식구의 생활을 꾸려 가야 했습니다.
그러자니 그 생활이 오죽했겠습니까.
고통의 세월을 넘어 어느덧 청년이 되었을 때 제 인생에도 따사로운 볕이 비쳤습니다.
마음 착한 여인을 만나 단칸방에서나마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먹구름이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말고도 다른 두 명의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어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저희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제 어머니이니까요.
이미 알코올 중독에 폐병까지 얻은 어머니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제 아내는 물론 이웃들에게까지 갖은 욕설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 남자하고나 어울리며 이웃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요.
보다 못한 저는 장성한 자식을 봐서라도 행동을 좀 조심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 간곡한 부탁을 외면한 채 도리어 제가 당신을 학대하고 폭행한다며 경찰에 고발하셨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기막힌 일이었지요.
저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백일을 갓 넘긴 딸의 모습이 눈에 밟혀 억울함만은 밝히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상 국선변호인을 선임해 달라고 부탁해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며 무죄를 밝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어머니와 법정에서 진실게임을 해야만 하는데,
모자간에 꼭 그런 비극적인 장면을 연출해야 되겠느냐?”
는 변호인의 설득에 그저 조용히 머리 숙이고 법의 선처를 바랄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은 부모를 학대(?)한 자식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혹독한 복역기간 중에 혼자 몸으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딸을 데리고 제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남은 수형 기간은 그야말로 분노와 증오의 세월이었지요.
어머니 역시 원망만 가득 찬 제 눈길을 피해 행방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졸지에 "혼자"가 되어 버린 저는 출소한 뒤에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가정을 꾸려 사는 동생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 신세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출소자 보호기관인 갱생보호소에 몸을 의탁한 채 술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삭이기 위해 마신 술 때문에
장이 파열되면서 복막염으로 진행돼 한동안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이어 몸까지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던 한 줌 희망이 제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내 삶에서 과거의 증오와 분노보다는 앞으로의 꿈과 소망이 더 소중하다고 말이지요.
몸을 겨우 추스르고 아내와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립던 두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진 채 그들 앞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그리움 속에 20년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던 딸아이가 어느덧 대학 3학년입니다.
딸아이가 맑고 고운 지금 모습 그대로 세상을 향해 곱게 피어나길 기도합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아내도 제가 지운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빌어 봅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지난 세월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어머니, 이제 미움과 원망의 시간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그리움의 시간이 된 듯합니다.
제가 딸아이를 그리워하듯 어머니도 어디에선가 이 아들을 그리워하고 계시겠지요?
이제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동안 마음에 품은 미움과 아픔일랑 모두 벗어 버리고,
그리운 마음 하나로 서로를 맞아들여 눈물로 상처를 씻어 줄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어디에 계신가요.
어머니!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