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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서로의 상처를 안아 주며 살겠습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82)

2011-05-14 08:01


30여 년 전,
나는 그 시대의 여느 딸처럼 생계와 아들의 출세를 위해 선생님이 되고 싶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일했지요.
밤이면 중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몰래 공부했지만 그것도 잠시, 시골로 내려와 농사나 지으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배추 심고, 고추 따고 그렇게 젊은 날의 반을 보내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 폭력 조직에 몸담았다는 소문이 있는 데다 고향에 돌아와 간척지 농사에 투자했다가 망한 그는 빈털터리였습니다.
게다가 열 남매 중 막내인데도 시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그를 못마땅해 했지만 나는 이미 그의 까맣게 탄 얼굴도 텁수룩한 머리도 좋기만 했습니다.
나도 이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감과
정비사 자격증이 있으니 자동차정비소를 차리겠다는 그에 대한 믿음으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집안은 엄청난 땅부자였지만 형제간의 불화 때문에 시부모님이 막내아들 몫으로 겨우 남겨 놓은
동네 끝자락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물 한 방울도 아끼는 시어머니 눈치가 보여 남들 다 자는 밤중에 빨래를 했고,
또 제사는 어찌 그리 많던지요. 몸은 고달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이 있어 힘을 냈습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첫째딸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20여 년을 객지로 떠돈 버릇 탓인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먹고 운전해 교통사고를 내기도 여러 번, 의처증까지 생겨 어린 딸 앞에서도 툭하면 나를 때렸습니다.
다 같이 죽어 버리자는 남편의 협박에 떨던 어느 날 따로 살자는 편지를 썼지만 차마 남편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같이 죽자며 집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다행히 나와 딸들은 남편을 피해 집 뒤 비닐하우스에 숨어 있었습니다.
세 살 밖에 안 된 둘째딸은 그사이 소리 없이 우는 법을 터득해 심하게 헉헉대며 눈물을 흘렸고
다섯 살 된 첫째딸은 동생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울지 말라 다그쳤습니다.
활활 불타오르는 집을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삼켰습니다.
어린 딸들에게 너무 일찍 아픈 세상을 보여 준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첫째딸의 일기장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말을 보았습니다.
이제 고작 한글을 뗀 아이가 자신의 삶이 불행하고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딸들의 고사리 손에 의지하며 살 듯이, 딸들도 내가 있었기에 그나마 의지하고 살아올 수 있었음을….
나는 그때 스스로 희망을 찾아나서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 희망과 함께 셋째를 갖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직 위태위태했지만 조금씩 달라지려고 애썼고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를 낳기 전날 남편은 벼를 베다 콤바인에 손가락 세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붙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펴지지 않는 그의 오른손 손가락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

그 뒤로도 남편은 술 먹고 운전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 사고가 이어지고,
양계장 지을 때 받은 융자금 독촉과 남편이 선 보증이 잘못돼 집이 경매에 붙여지는 등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이 가슴속에 쌓여 풀 길이 막혔는지
언제부턴가 가슴이 떨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저는 정신과 병원에서 지어 준 수면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 것을 아는지 어린 딸들은 아빠가 외출하면 따라가 술 먹는 것을 말리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갖은 애교로 기분을 맞춰 줍니다.

이제 큰딸이 대학교 1학년, 둘째딸이 고2, 셋째딸이 중2입니다.
나의 꿈도 잃고 눈물로 살아온 세월이지만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며 내가 가진 행복들을 헤아려 봅니다.
언젠가 딸들이 준 사랑한다는 말이 담긴 편지,
그리고 성질이 불 같은 남편이 쑥스러운지 내던지듯 건네준 꽃다발…,
그 속에서 고단한 세월이 녹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디선가 “성공은 얼마나 많은 시련을 이겨 냈느냐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끔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면 또 술을 먹고 오는 건 아닌지 가슴이 떨립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고,
많은 형제 속에서 외톨이로 자란 남편의 아픔을 알기에,
그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임을 알기에,
서로의 상처를 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