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남매의 넷째입니다.
부모님은 깨진 놋수저 두 벌과 찌그러진 밥그릇 두 벌로 신혼을 시작할 만큼 가난하셨죠.
하지만 부지런하고 착한 부모님은 산에서 나무도 해다 팔고 남의집 일을 열심히 해서
몇 년 만에 겨우 송아지 한 마리를 사셨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던지 갓난아이 젖 주는 것도 잊다가 아기를 눕혀 놓은 나무 밑으로 뛰어와 보니,
옆에서 낮잠 자는 큰아이 발가락을 빨고 있더랍니다.
어머니는 이 시절이 제일 행복했노라고 합니다.
어느 날부터 덮쳐 온 불행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날품을 팔러 가신 아랫마을 집에서,
마당으로 들어서는 담뱃잎을 산처럼 쌓은 리어카에 일곱 살 언니가 치었습니다.
언니는 하늘로 붕 떴다가 떨어졌습니다.
언니는 신장이 파열돼 대전 큰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날부터 우리집에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언니 병원비를 대느라 아버지는 어렵게 마련한 땅과 복덩이 소를 팔아야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빚을 얻었는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 결국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중학교 진학을 준비했던 오빠는 학교를 포기하고 삼촌이 다니는 서울 공장에 갔습니다.
순하고 착한 오빠는 한마디 원망도 없이 울면서 서울로 떠났습니다.
며칠 뒤 이번엔 남동생이 머리가 아프다면서 날마다 울었습니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민간요법만 쓰다가 동생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여덟 살에 부모님을 여의어 자식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날마다 막걸리로 아픔을 달래셨지요.
어느 해부터 특수 작물 붐이 일어 아버지는 논을 빌리고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딸기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른 집에 다 있는 경운기도 없어 부모님은 지게로 모든 걸 져 나르며 밤도 낮 삼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빚도 갚고 산골 다랑이 논도 다섯 마지기나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빠와 큰언니가 공장에 다니고 제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오빠였습니다.
오빠는 공장 생활을 그만두고 내려와 군청 청소부로 취직했습니다.
부지런한 오빠는 군청에 다니는 틈틈이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포도와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오빠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일으켰지요.
안쓰러운 마음에 군청만 다녀도 먹고 살 수 있으니 쉬엄쉬엄 하라고 했더니
자식한테는 죽어도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 나이 마흔에 처음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으니까요.
동생들은 모두 결혼해 아이가 있고 오빠 친구들도 다들 학부형인데 오빠는 얼마나 부러웠을까요?
그런데 추수가 끝난 늦가을 오빠에게 갑자기 황달이 왔습니다.
불안감을 억누르고 병원으로 갔더니 간암, 그것도 말기여서 수술해도 위험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왜 그리 산 넘어 산인지,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기 몸 아낄 줄 모르고 가족들 위해서 한번 살아 보겠다고 노력한 결과가 겨우 암이라니….
우리는 오빠를 제일 좋다는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병에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 먹였고, 용하다는 한의원, 하다못해 무당 굿까지 할 것은 다해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8천만 원이 넘는 돈을 썼습니다.
다들 그만그만하게 사는 여동생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습니다.
오빠가 우리에게 어떤 오빠인데…, 오빠는 반드시 나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1년 5개월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오빠는 복수가 차고 혼수상태가 오면서 따뜻한 봄날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오빠가 있을 때는 반질반질하던 산골 다랑이 논이 3년째 묵고 있습니다.
포도밭도 남의 손에 넘어갔고요. 잡초 투성이인 논을 보면 오빠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오빠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오빠는 세상을 떠나서도 어머니를 돌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오빠가 생전에 들었던 공무원 연금에서 지급되는 유족 연금으로 살고 계십니다.
고혈압에 신장결석 수술을 하신 어머니, 이제는 어머니가 늘 걱정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여기까지 한마디 한마디 써 내려오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겨울이 옵니다.
아버지 산소 옆에 오빠의 뼛가루도 뿌렸는데 두 사람 이제 외롭지 않겠지요.
더 이상 슬픔 없는 곳에서 우리 식구들 이별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