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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니까요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51)

2011-05-16 06:17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울산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머리가 자주 아팠지만 어려운 형편에 과외로 생활비를 벌고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공부하느라 신경을 많이 쓴 탓이려니 하고 진통제로 견뎌 왔습니다.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일에 얽매여 병원 갈 시간이 없어 그냥저냥 버텼지요.
그러던 10월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아픔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명은 선천성 뇌동정맥 기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제 뇌 사진을 찍어 보더니 마치 큰 나뭇가지에 까치집을 지어 놓은 것처럼 뇌혈관이 엉켜 있다면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열두 시간에 걸친 수술은 아주 잘되었지만 왼쪽 몸의 마비가 심했습니다.
팔 다리뿐 아니라 시신경도 손상을 입어 왼쪽 눈마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활치료를 받으며 연습한 끝에 세 달 뒤 퇴원할 때에는 한두 발짝이나마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퇴원 이틀 전 재활병동에 있는 무료 이동 도서관 수레에서 책을 고른다고 바닥에 앉았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자원봉사를 하던 한 남자가 저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도 모르게 수술비며 결혼에 관한 걱정거리를 털어놓았습니다.
퇴원하는 날 그는 편지 한 장과 얼마의 돈을 건네주더군요.
병원 근처에서 작은 가게를 하며 봉사하러 다닌다는 그는 저뿐만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여럿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대학 때부터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의 부모님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시더니
제가 아픈 걸 안 뒤로는 반대가 심하셨습니다.
결국 퇴원하고 일 년 만에 헤어졌지요.
우울한 마음으로 겨우겨우 하루를 넘기던 어느 날, 이동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결혼은 했냐고 묻기에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자가 한 번 약속을 했으면 끝까지 지켜야지 병들었다고 버리는 그런 나쁜 사람이 다 있냐며 몹시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한달음에 울산까지 내려와 자기랑 두 가지만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자포자기해서 아무 남자와 결혼하지 말 것.

그는 약속을 잘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며 서울에서 거의 날마다 전화를 했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제게 그림을 그려 보라며 물감과 붓, 그림 관련 책까지 보내 주더군요.
그러다 어느새 정이 들었나 봅니다.
그가 청혼을 했습니다.
그는 장애인을 도우면서 사느라 노총각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장애인과 결혼할 거라고 늘 얘기해왔답니다.
그래서인지 시댁 식구들도 몸이 불편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친정 엄마는 결혼식 날 제가 인연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아팠던 거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정말 부부는 하늘이 맺어 주는 것인가 봅니다.

첫아이를 낳을 때 병원에서는 아이 낳느라 힘을 쓰다 보면 자칫 뇌혈관이 다시 터질 수 있다며
제왕 절개 수술을 권했지만 저는 자연분만을 고집했습니다.
무사히 아이를 낳았을 때는 제 뇌수술을 해 주신 신경외과 의사선생님까지 찾아와 기적이라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처럼 새 삶을 살게 된 지 어느덧 십 년입니다.
어느 때는 뜨거운 찜질을 하면 좋아진다고 엄마가 찜질을 해 주셨는데 화상을 입었습니다.
감각이 없으니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 거지요.
나무토막 같이 뻣뻣한 내 몸을 내려다보는 절망감이란….
또 사귀던 사람이 떠났을 때 죽고 싶었던 그 심정들….
하지만 막내딸이 나쁜 생각을 할까 봐 밤새 제 방 문에 귀를 대고 기척을 살피셨다는 친정 엄마
그리고 나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천사 같은 남편,
장애인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신 시부모님이 계셨기에 그 괴로움의 시간들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제 삶은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문득 불편한 몸이지만 제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남편이 하는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남편이 배달을 가면 혼자 가게를 지킵니다.
그렇게 남편을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제 아이들이 있으니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한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