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의 이혼 소송을 기각한다.”
1년을 넘게 끌던 남편의 이혼 청구 소송이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나는 사남매의 막내로 경찰공무원인 아버지를 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장손과 결혼한 나는 반 년 동안 시집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직장을 얻으면서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났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싸움도 많이 했지만 두 딸을 두고 그런대로 오순도순 살아왔다.
그동안 일곱 번의 이사 끝에 25평 아파트도 장만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년여를 직장 여직원과 몰래 만나 온 남편은 아파트를 장만한 직후 내게 이혼을 요구했다.
붙잡을 겨를도 없이 남편이 집을 나가고 시댁 식구들이 몰려와 이혼해 주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듯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고 열한 살인 큰딸, 일곱 살인 작은딸을 생각하니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남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며칠 뒤 그 여자를 만났다.
의외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 여자가 밉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죠. 아줌마네 가정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 아니에요”
라는 말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만에 생활비가 떨어지고 시댁 식구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저축한 돈은 집 장만하는 데 다 써 버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데, 대출금과 생활비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 파출부, 탁아모, 식당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해 나갔다.
동시에 이혼하려는 남편과 이혼하지 않으려는 나의 치열한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교편을 잡고 있는 언니, 오빠들은 나를 집안 망신시킨 애물단지로 여겨 도움은커녕 홀로 계신 어머니와의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 소송 중에 남편과 그 여자는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다급해진 시댁 식구들과 여자는 혼인 파탄의 책임을 오히려 내게 덮어씌웠다.
하지만 친구들의 증언과 여기저기서 도움을 얻어 결국 판사는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텨 온 내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뒤 희망 없는 동거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 여자는 떠났고, 남편은 퇴직금을 다 날린 것도 모자라 3천만 원의 카드빚까지 졌다.
뒤늦게 남편이 재결합을 요구해 왔지만 난 단호히 거절했고, 내가 카드빚을 갚는다는 조건으로 집을 내 앞으로 명의 이전했다.
어른들의 싸움에 가장 상처 입고 고통받은 사람은 바로 어린 자식들이었다.
아빠와 친척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엄마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불안해하며 눈치를 보았고, 내 기분을 맞춰 주려 애썼다.
열한 살, 일곱 살 아이가 청소에 설거지, 빨래까지 해 놓고 나를 기다렸다.
퇴근하고 돌아와 깨끗한 집안을 둘러보면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다.
재결합하자는 남편의 청을 거절하면서 왜 이혼해 주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처음에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어디 나 없이 얼마나 잘사나 보자"는 복수심이 앞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승리의 쾌감도 남편에 대한 복수심도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대신 나 혼자서도 아이들과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이혼을 했더라면 아이들은 친척 집을 전전했을지 모른다.
그런 사태만은 막으려고 불완전하나마 가정을 지켜 온 것이다.
남편은 아직도 직장 없이 떠돌고 있고 그 여자는 몇 년 전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에게 “내가 겪은 아픔을 네가 알아? 그 고통을 한번 느껴 보게 나 또한 너와 똑같이 해 줄까!” 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정이 그 여자에게도 역시 소중하겠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상상을 털어 버린다.
5년이 지난 지금,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학원 청소 일을 해서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은 전화도 가끔 하고 아이들 생일에는 밖에서 만나기도 한다.
요즘은 부쩍 남편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냥 덮고 물 흐르듯이 살아가려고 애쓸 뿐이다.
내게 소원이 있다면 아이들이 제 길을 갈 때까지 내 몸이 건강해 뒷바라지 하고,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호떡, 떡볶이를 실컷 먹게 조그만 분식점을 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단돈 천 원이 없어 분식점 앞을 기웃거리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푸짐한 떡볶이를 내놓는,
엄마같이 자상한 분식집 아줌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