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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못난 아빠의 작은 꿈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66)

2011-05-18 12:21


어린 시절 엄마 없는 온갖 서러움과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왔다.
가시밭길처럼 힘든 사회생활이었지만 참고 견디며 성실히 살아 제관 기술자가 되었고 가정도 꾸렸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젊음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두 딸이 있어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날은 한여름이라 일하는 내내 땀이 뻘뻘 흘렀지만 저녁에 있을 둘째딸의 돌잔치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만 설레는 마음으로 일을 서두르다 발을 헛딛는 바람에 건물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깨어 보니 전신 마비, 왼쪽 눈 실명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발버둥치며 여러 번의 수술과 값비싼 의료기까지 착용해 보았지만 나무토막과 같은 몸은 그대로였다.

아내는 엄청난 치료비에 시달리다 돈을 번다며 몰래 술집에 다녔는데, 얼마 뒤 말 한마디 없이 내 곁을 떠나 버렸다.
믿었던 아내의 배신으로 인한 아픔과 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2년을 눈물 속에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해 오신 재활의학과 과장님이 내 딱한 사정을 듣고 국립재활원으로 보내 주셨다.

내 굳은 몸은 심한 욕창에 걸려 있었는데, 국립재활원 담당과장님은 희망을 잃지 말라며 웃음으로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재활 치료를 하려면 먼저 욕창 수술을 해야 하니 쇠약해진 몸부터 회복하자며 많은 먹을거리를 보내 주셨다.
또한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두 번의 수술로 지긋지긋하던 욕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국립재활원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두 달로 제한되어 있어 재활 치료로 녹초가 된 몸으로 밤늦게까지 혼자 휠체어를 미는 연습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누워만 지내던 내가 앉을 수 있었고 보조기를 끼면 밥도 떠먹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내 손으로 밥을 떠먹던 날의 감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동안 돌봐 주시던 간병인들이 단체의 재정 문제로 오지 못했다.
다급해진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한 달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바쁘다며 냉정하게 끊어 버렸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북받치는 서러움에 목숨을 끊으려 했는데,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과장님이 아내에게 남편을 데려가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장애인 시설로 갈 때까지라며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오매불망 그리던 딸들은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다친 뒤 처음 먹는 삼겹살을 딸들이 서로 먹여 주겠다고 다투는 모습을 보며
이 평범한 행복조차도 가질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서글펐다.
이렇게 딸들 곁에서 살다 죽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다음날 아내는 결혼할 사람이라며 낯선 남자를 데려왔고 공부를 하던 애들이 그 남자에게 달려가 “아빠” 하며 양팔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가 "꽝" 울리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마저 남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뼈를 깎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오직 복수심으로 하루를 견뎌 가는 나를 보고 병원 전도사님과 봉사자들은 딸들을 위한다면
아내를 용서하고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셨다.

며칠 뒤, 내가 떠나는 것이 두 딸의 앞날을 위한 길이라 되씹으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딸들이 아버지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이 아빠를 용서하고, 부디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 주길 빌며 이곳 장애인 시설로 오는 차를 탔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두 딸의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모든 걸 버리고 체념한 채 이곳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 미술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붓놀림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코 끝이 찡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무기력한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다음날부터 한자와 서예를 배우기로 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거리감을 가늠할 수 없고 감각 없는 손가락 대신 손목의 힘으로만 쓰려니
펜 끝이 제멋대로 움직여 짜증이 나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내게 남아 있는 능력을 찾고 싶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연습해 지난 11월에는 한자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다.

휠체어에 앉아 한 획 한 획 그을 때마다 20년 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아빠로 어른이 된 딸들 앞에 설 순간을 그려 본다.
그리고 "한자시범시험"에 꼭 합격해 우리 가족들,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이곳의 수사, 수녀님들께 은혜를 갚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