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 형제 얼굴을 모른다.
포대기에 싸여 부산 영도에 있는 어느 집에 맡겨졌고, 이름도 그 집 주인 성을 따라 지었다.
버스운송업을 하던 주인집은 마당이 넓은 이층집이었다.
나는 유모 할머니를 따라 잔심부름하는 보조식모였다.
사모님은 날마다 곱게 화장하고 반지며 귀걸이를 치렁치렁 달고 의상실로 출근했다.
두 아들이 학교에 갈 때면 나도 책가방 들고 따라가고 싶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글도 애들이 공부하는 어깨 너머로 겨우 익혔다.
둘째아들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늘 나를 못살게 들볶았다.
식구들이 식사를 마친 뒤 밥을 먹으려고 하면 내 밥그릇에 "퉤" 침을 뱉고 달아났다.
나는 침 묻은 쪽만 덜어 놓고 밥을 먹는 일이 허다했다.
하루는 사모님 친구들이 놀러 와서 시중을 드는데, 한 아주머니가 핸드백에 든 돈이 없어졌다며 소란을 피웠다.
당장 나는 범인으로 몰렸고 아니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모님은 "도둑년을 내 집에 둘 수 없으니 당장 나가라" 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까지 지낸 그 집에서 쫓겨났다.
장마에 오갈 데 없던 나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뒤 유모 할머니가 몰래 나오더니 다른 집에 소개해 주겠다며 연락처를 하나 주셨다.
유모 할머니는 아이들이 먹다 남긴 과자를 쥐어주면서,
둘째아들이 핸드백에 손대는 걸 봤는데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며 내게 미안해 했다.
유모 할머니가 소개해 준 집으로 가니 이미 사람을 구했단다.
내 사정을 듣고 난 주인은 서울에서 중국음식점을 하는 동생 부부네 집안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그 길로 주소 적힌 종이를 들고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여행이 소원이었는데 막상 타고 보니 자꾸 눈물만 솟았다.
울다가 졸다가 새벽 청량리 역에 내려 대합실에서 날이 밝길 기다렸다.
날이 밝아 소개받은 집에 찾아가니 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이는 없고 부부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오니 청소와 빨래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를 애처롭게 여긴 주인아주머니는 YWCA에서 운영하는 야간학교에 등록시켜 주었다.
꿈만 같았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열아홉 살, 늦은 나이였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야간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런 어느 겨울, 아주머니가 친정어머니의 병문안을 간 날이었다.
그날 밤 잠결에 술 냄새가 나고 몸이 바위에 눌린 듯 무거웠다.
깨어 보니 주인아저씨가 나를 덮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며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주인아저씨는 아주머니한테 얘기하면 쫓겨날 테니 아무 소리 말라고 협박했다.
그날 이후 아저씨는 틈만 나면 내게 수작을 부렸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만 태웠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몸이 이상했다.
나보다 먼저 아주머니가 알아채고 임신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병원에 가니 역시 임신이었다.
모든 사실을 아주머니에게 털어놓았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한참 울더니, 결심한 듯 내게 자식처럼 키워 준다며 아이를 낳아 달라고 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 그곳에 머물러 아기를 낳았다.
딸이었다.
천지에 피붙이라고는 없던 나는 아기를 보자 강한 핏줄의 끌어당김을 느꼈고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못난 엄마였기에 가슴에 따뜻하게 한번 품어 보지도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다행히 아주머니가 착한 분이니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뒤로 달동네에 살면서 식당 일이며 점원 일 등 닥치는 대로 했다.
야간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용학원을 다녔다.
미용보조사로 3년을 일한 끝에 어엿한 미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주위 아는 분의 소개로 한 번 결혼에 실패한 남자와 결혼해 지금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큰애는 딸 둘째는 아들, 두 아이 모두 내 배 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자식이다.
내 몸으로 낳은 자식을 키우지 못한 죄인이기에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평생 남편에게도 말 못하는 아픈 과거를 홀로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지만
"엄마"라고 불러 주고 "여보"라고 불러 주는 소중한 가족이 있어 조금은 웃을 수 있다.
힘들고 괴롭더라도 참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 행복은 찾아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