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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17년을 기다린 사랑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95)

2011-05-20 10:33


소영이가 오기 전에 쌀을 안쳐 밥을 짓는다.
소영이는 그러지 말라 하지만 같이 살기로 했을 때 내 자신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잘해 준다는 각별한 생각보다 그저 아내 일, 내 일 가려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초보 남편인 나는 한 달 전만 해도 결혼을 남의 일로만 여겼던, 마흔다섯 살 먹은 2급 지체장애인이다.
제대한 이듬해 친척의 권유로 경기도 광주에 남의 밭을 빌어 양계장을 시작했다.
길이 50m의 양계장이 열네 동,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무리인 규모였지만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웃통을 벗어 제치고 일했다.
내 몸 돌볼 새가 없어 끙끙 앓다가도 일어나 사료를 주고 물을 주고 온도를 맞춰 줘야 했다.
밤을 새워 일하는 나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독종"이라고 불렀다.
소태처럼 쓴 밥을 물 말아 억지로 퍼 넣다 말고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목이 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덕에 1년 만에 투자비를 뽑고도 돈을 제법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 뒤 겨울부터는 양계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가격이 뚝 떨어졌다.
양계장을 비우고 동인천 지하상가에 한 달 동안 세를 얻어 크리스마스 카드 장사를 했다.
그때 소영이를 만났다.
우리는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며 사랑을 키워 갔다.

다음해 봄에 다시 양계를 시작했고 그해 7월 중순경이었다.
중앙선을 넘어 달려드는 차를 피하려다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오른팔이 장작불에 활활 타는 듯한 고통 속에 이틀을 버텨 낸 뒤에야 깨어났다.
의사는 오른팔 중추 신경이 몽땅 끊어져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소영이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물빛처럼 흔들리는 시선이라든가
좁은 간병인용 간이 침대 사용을 불편해 하는 그녀의 짜증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장애인과 함께하다 보면 별의별 어려운 일이 생길 게 뻔한데 철없는 소영이가 견뎌 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헤어지자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한 달 만에 퇴원을 한 다음날, 우리는 속초로 여행을 갔다.
몇 번이나 헤어지자는 얘기를 꺼내려 했지만 오랜만의 여행에 신이 나 있는 소영이에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소영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써 놓은 편지를 쥐어 주고 돌아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손을 흔드는 소영이를 보니 목이 메었다.
집에 오니 여기저기 소영이의 흔적 투성이였다.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돈이 안 되는 양계장을 정리하고 전화도 해지했다.
전화번호 외에는 달리 나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일이나 소영이보다 급한 것이 내 몸이었다.
전국의 유명하다는 병원은 모두 다녀 봤으나 치료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장 12시간에 걸쳐 신경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흉터만 남고 오른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팔을 전혀 못 쓰는 2급 지체장애인, 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망 없는 팔에 전전긍긍하느니 다시 무슨 일이라도 하자 마음먹었다.
작은 인쇄소를 차려서 몇 년을 했고,
건축업도 해봤고,
수산물 수입회사에 취직도 해봤고,
노점상도 해봤고….
 
 
숱한 일들을 했다.
겉보기에 잘 드러나지 않는 팔의 장애로도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던지…, 돌이켜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지금은 보통 사람보다 절반 정도의 봉급을 받고 컴퓨터 수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게 17년을 살아오다 극적으로 소영이와 마주쳤다.
병원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어갔는데 소영이가 의자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었다.
숨이 탁 멎는 것 같았다.
17년이 흘렀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았다.
내 첫마디는 편지 한 장 건네고 사라져서 미안하다였고, 소영이의 첫마디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아보려 애쓰지 않아 미안하다였다.
소영이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주벽이 심한 남편이 손찌검까지 해서 2년 전에 이혼하여 아이와 둘이 산다고 했다.
맑고 곱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가득했다.

우리는 다시 몇 달을 만나다 한 달 전, 북한산 약수터에서 길어 온 정한수를 떠 놓고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세상 풍파에 시달려 온 우리라서 더 애틋하고 진솔할 수 있지 싶다.
어려운 사람끼리 힘들게 만났으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둘의 전세금을 합치면 방 두 개짜리로 이사도 갈 수 있을 듯하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
나는 요즘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