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첫아이가 유산되고 다음해 승호를 낳았지요.
남편은 중장비 기사였는데, 일을 알선하는 중개업자가 3년 가까이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990년 1월 30일. 잊을 수도 잊혀지지도 않는 그날,
남편은 일해 주던 한 회사에 정식 채용되어 기뻐하며 첫 출근을 했다가 그만 사고가 났습니다.
장 파열이 심해 수술 뒤 중환자실로 옮겼지만, 다음날 의사선생님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남편은 정말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17일 만에 깨어났고 뒤늦게 머리가 터져 곪은 것을 알고 치료를 시작했지요.
남편은 장을 많이 잘라 내서 대변을 허리에 연결된 관으로 받아 내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경황이 없었던 저는 둘째를 임신한 사실조차 몰랐어요.
뒤늦게 유산을 결심했지만 의사의 만류에 아이를 낳기로 했지요.
그 즈음 남편은 허리로 받아 내던 대변을 다시 항문으로 돌리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내 몸은 임신중독이 심해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부어 있었지만,
산재보상 때문에 남편 회사로, 노동부로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승호 걸음이 이상했습니다.
부랴부랴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술로 둘째를 낳고 병원비가 무서워 사흘 만에 바로 퇴원했습니다.
몸조리할 틈도 없이 두 아들을 업고 안고 노동부를 오가며 산재보상 문제를 처리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회사가 부도 위기로 법정 관리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요구한 보상액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합의를 보았습니다.
승호는 이름조차 모르는 병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날이 바싹 마르고 엎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승호를 보고도 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승호는 장애아 학교에 입학했지만 반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했고 엄마를 찾으며 마냥 울기만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3학년 때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머리를 다쳐 기억력도 없는 남편은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보상금은 조금씩, 조금씩 없어졌지요.
그래서 승호를 복지관에 보내고 제가 복지관 도우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승호가 병을 앓은 지 10년 만인 2000년, 근육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근육병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특이한 형태라서 의사들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올해 열여덟 살인 승호는 몸무게가 겨우 17kg입니다.
온몸이 마비 상태이고 혀도 굳어서 “엄마”를 겨우 부릅니다.
게다가 4년 전 검사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기도를 수술했는데, 지금까지도 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승호가 할 수 있는 건 머리 흔들고 눈동자 움직이는 게 전부랍니다.
욕창이 생길까 봐 자주 돌려 눕혀 주는 것 말고는 엄마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너무 슬픕니다.
승호는 지금 제 옆에서 비디오를 보다 저를 보다 합니다.
비디오가 승호의 유일한 친구지요.
머리 맡에 줄줄이 쌓인 호흡기 줄, 석션기, 소독약….
가래를 빼 줄 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승호를 보면 차라리 모든 것 다 버리고
하늘나라에 가서 제 발로 콩콩 뛰어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승호가 아픔을 겪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아픈 형 때문에 어리광 한 번 맘껏 피우지 못한 둘째 은기,
착하게 자라 준 그 아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그 누가 알까요.
승호에게 꼭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승호야,
네가 엄마 아기였다는 게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었어.
우리 같이 있는 동안 행복 가득한 날들 보내자.
너에게 아픔을 몽땅 빼앗고 웃음만 주고 싶은 것이 엄마가 가진 단 하나의 소망이란다.
승호야,
우리 가족 모두 너를 정말정말 사랑한다.
우리 작은 천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