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친정 식구들은 곱게 키운 외동딸을 집안 형편 어렵고 직업도 없는 남자에게 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저는 착하고 성실한 그의 모습에 끌려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보증금 한푼 없는 사글셋방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한 신혼 시절, 그래도 마음만은 참 부자였습니다.
남편은 개업 기념품 등을 제작하는 광고사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가게였지만 부지런한 남편 덕분에 곧 전세방으로 옮길 만큼 살림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임신 8개월째, 임신중독증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고 시력이 뚝 떨어졌습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썼지만 병원에서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하다고 하자 남편은 저를 꼭 살려야 한다며 당장 수술하자고 했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결국 우리는 건강한 아기를 품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지요.
결혼 3년 만에 조그만 연립을 장만해 친정식구들의 따갑던 시선도 점점 누그러질 무렵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이 보증을 선 친척 분이 야반도주를 한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시아버님도 같이 보증을 섰다는 것입니다.
아버님 평생의 재산인 집과 그동안 피땀 모아 마련한 연립을 모두 팔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시부모님과 단칸방에서 다시 시작하며 다달이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갔습니다.
남편과 저는 마음만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악몽 같던 빚을 다 갚고, 아들이 열 살이 될 무렵에는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살 수 있는 적금도 타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부푼 마음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남편이 앞이 잘 안 보인다며 자꾸 눈을 비벼 댔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실명은 물론 눈동자마저 푹 꺼져 버린다는 엄청난 말을 했습니다.
집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당장 입원해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치고 병원을 나선 남편이 수술 전보다 더 보이지 않는다며 더듬거리는 게 아닙니까!
의사선생님은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아 그럴 수 있다며 차차 좋아질 거라고 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뒤늦게 의사선생님은 원래 그 병은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며 눈동자 함몰만이라도 방지했으니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벽을 긁어 대도 어둠뿐인 세상에서 몸도 마음도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살던 옛 모습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 남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남편은 신앙의 힘으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이겨 내려 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남편이 아프면서 제가 대신 가게를 맡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둘이 함께 가게로 출근했습니다.
남편이 공장에 전화도 해 주고 견적 뽑는 법도 일일이 옆에서 일러 주니 서툰 가게 일이 수월했습니다.
무엇보다 옆에 있는 것이 든든했습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저는 남편의 눈이 되고 남편은 제 마음의 눈이 돼 주었습니다.
돌아보면 세찬 비바람이 쉴 틈 없이 몰아치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남편과 함께해 온 지난 시간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비바람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 뜨겁게 더 가까이서 서로를 부등켜안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부부의 희망인 아들이 어느덧 다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명절이면 맏이인 남편을 보러 사 남매가 다 모입니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의좋기로는 따라올 집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요즘 경기가 어렵다 보니 얼마 전부터 일거리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동안 남편과 같이 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욕심 없이 살았는데 조금 힘이 드네요.
어둠 속에 사는 남편이 그래도 일터라고 아침이면 힘차게 나오는 곳이라 임대료 내기도 벅찬 가게를 쉽게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손님 한 명 없는 가게에서 애써 답답한 마음 감추며 앉아 있지만, 기운 내렵니다.
이보다 더한 고난도 함께한 우리 부부,
또 오뚝이처럼 슬기롭게 잘 이겨 나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