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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나는 절대로 울지 않을 거예요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65)

2011-05-25 16:18


7년 전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의 반지하방 두 칸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작은 방에서 먼지를 마시며 미싱자수 일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동생은 1학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시끄럽던 미싱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시골 할머니가 올라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빠가 입원해서 엄마도 병원에 갔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뒤 엄마가 집에 와서 “이것들 불쌍해서 어쩌나” 하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날 밤 엄마가 할머니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아빠가 급성백혈병에 걸렸는데 의사선생님이 고치기 어렵다고 했다는 겁니다.
어린 마음에도 백혈병이 무서웠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아빠는 긴급 수혈을 수십 차례 받았고,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날마다 위액까지 다 나올 정도의 구토에 시달렸습니다.
또 면역성 결핍으로 온몸에 생긴 물집과 종기로 온갖 고통을 겪으며, 지루한 항암치료를 4차까지 받았습니다.
완치는 아니지만 "관해 상태"라는 좋은 결과로 퇴원한 뒤에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 말씀 때문에 아빠는 집에서도 마스크를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아빠와 같은 병으로 치료를 받던 아저씨가 놀러 오셨습니다.
두 분은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이 부둥켜안고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정말 반갑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분이 똑같이 마스크를 쓰고 아이들처럼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몇 개월 뒤 병이 재발해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아빠는 심한 충격을 받고 한동안 모든 의욕을 잃은 듯했습니다.
가족 모두 초긴장 상태로 아빠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아빠의 요양을 위해 시골로 이사 왔습니다.
아빠는 지금도 완치 판정을 받지 못해 계속 요양 중이고 엄마가 가장 노릇을 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아빠는 병원비며 우리 교육비며 돈 들어갈 곳이 많다는 이유로 무척 검소한 생활을 하십니다.
18년 전 결혼할 때 장만한 양복이 전부인 단벌신사이고, 10년도 넘은 뒷굽 다 닳은 낡은 구두를 아직도 신고 다닙니다.
동네 이발소도 많은데 무료 쿠폰을 준다는 이유로 자전거로 30분 거리인 이웃 마을 미장원까지 갑니다.

아빠는 쉽게 피로해지고 조금만 무리하면 입 안에 염증이 생기는데도 밤 11시면 학교로 저를 마중 나옵니다.
친구들 부모님은 번쩍번쩍하는 차를 주차해 놓고 기다리는데,
아빠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와서 한쪽 모퉁이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나오면 “정은아!” 하고 부릅니다.
아빠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처음에는 초라해 보이는 아빠와 고물 자전거가 무척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얼마 전 엄마가
“여기서 나 혼자 벌어서는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겠어요. 서울 가서 돈 벌어야겠어요”
하며 아빠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때부터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데 부모님은 오죽하셨을까요.
결국 엄마는 아빠와 우리 자매를 남겨 놓고 서울로 가셨습니다.

오늘은 밤하늘 달이 유난히 동그랗습니다.
덜커덩덜커덩 달리는 아빠 자전거 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7년 전 잘못 되었다면 지금 제 앞에 계시지 않을 아빠.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소중한 아빠와 함께라면 고물 자전거를 타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지난 추석, 엄마는 선물이라면서 헌옷 보따리를 낑낑 메고 오셨습니다.
부자 됐다며 좋아하는 부모님 앞에서 나와 동생은 두 분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겉으로만 좋은 척했습니다.
그 일도 괜히 미안해집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가족이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우리 남매 곁에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아빠엄마가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울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아빠도 꼭 건강해지리라 믿습니다.
 

“엄마아빠, 동생과 제가 나중에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때 우리 함께 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