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 지친 모습으로 퇴근한 남편이 부탁을 합니다.
“한 시 반에 인천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당신이 나 좀 꼭 깨워 줘. 알았지?”
남편은 꼭 깨워 달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더니 대충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까칠하게 변한 피부, 살이 쏙 빠진 볼….
카인테리어 가게가 안되어 애태울 때부터 장거리 운전을 하는 트럭기사로,
몇 년 동안의 고생이 남편의 지친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시간이 흘러 남편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는 남편, 흰자위가 어찌나 빨갛게 충혈됐는지 저는 그만 울 뻔했습니다.
남편과 만난 지 5개월 만에 그의 성실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는 가진 것 없는 그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적게 쓰고, 같이 벌면 되지 않느냐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항해사로 배를 타려던 남편은 신혼 때부터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며 중소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 때 기초 공사를 해 주는 회사였는데, 월급이 정말 쥐꼬리만 했지요.
그래도 두 딸을 낳아 키우는 동안 행복했고, 억척스럽게 맞벌이를 해서 결혼 4년 만에 작은 아파트도 장만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현장에서 일하다 어깨를 다쳤습니다.
그저 가벼운 타박상인 줄 알았지만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회사에 이야기했더니, 어이없게도 회사 일하다 다쳤다는 증거가 있느냐며 치료비를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픈 몸으로 회사에서 쫓겨난 뒤 2년 넘게 실직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동안 병원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결국 집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장이 구해지지 않자 남편은 친구가 하는 카센터 옆에 카인테리어 가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경기 탓에 가게를 접어야 했고 2년 동안의 월세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습니다.
게다가 저도 작년부터 빈혈이 심해져 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도 빚은 늘어 갔고, 몇 번이나 쌀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집에 쌀이 떨어지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사냐고, 게으른 게 아니냐고, 혹시 낭비하는 게 아니냐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만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세수를 하고 잠이 좀 깬 듯한 남편에게 두꺼운 잠바를 입혀 주고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쥐어 주며,
졸지 말고 운전하라고 신신 당부했습니다.
출발하기 전 트럭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편은 창가에 서 있는 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입니다.
그리고는 손을 한번 흔들고는 트럭을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한 달 중 거의 반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항구도시로 쉼 없이 달리는 남편이
행여 운전 중에 졸기라도 할까 봐, 피곤에 지쳐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어제는 석 달째 연체된 남편의 카드 최고 변제장이 왔는데 120만 원이라는 금액이 적혀 있었습니다.
카인테리어 가게를 할 때 재료비를 구하느라 카드를 쓴 모양입니다.
카드사 직원은 얼마 안 되는 돈이니 나눠 낼 수도 없다며 빨리 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 120만 원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갑자기 카인테리어를 맡기고는 50만 원을 떼먹고 달아난 손님이 생각나더군요.
그 사람이 돈만 냈어도 남편 카드가 연체되지는 않았을 텐데,
"벼룩의 간을 빼먹지, 가난한 사람만 울리는 웃기는 세상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습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야 하는 거겠지요?
지금 저희는 친정오빠 집에 얹혀살다시피 합니다.
그것만도 미안한데, 오빠는 우리 부부가 안돼 보였는지 얼마 전엔 20kg짜리 쌀을 놓고 갔습니다.
밤새 운전해서 힘들게 번 남편의 월급을 고스란히 빚 이자로 주고 허무해서
“우린 이자만 갚는 인생인가 보다”라고 하소연했더니 남편이 그러더군요.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남편이 무사히 인천에 도착할 아침 8시까지 저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편과 우리 가족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아자아자 파이팅"을 외쳐 봅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