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의 폭력과 의처증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집을 나갔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술만 마셨고 저와 동생을 돌봐 주시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새벽이면 신문배달, 방과 후에는 통닭집 배달로 생계를 이어 가며 서툰 살림까지 도맡았습니다.
힘들게 신문배달을 해도 아버지가 보급소에서 저 몰래 월급을 타 다가 술값으로 탕진하기 일쑤라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지요.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쇄소에 취직했고, 그 사이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소식이 끊겼습니다.
인쇄소에서 일하는 동안, 퇴근하면 야학에서 못다 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몇 년 사이 동생과 지낼 방 한 칸을 얻고 저금도 꽤 했습니다.
하지만 은행 이자보다 훨씬 이익이라는 말에 아는 분에게 돈을 맡겼다가 몽땅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동생이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을 빌릴 곳이 없어 사채를 썼습니다.
그때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지요.
사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일요일도 없이 야근해도 이자조차 갚기 벅찼습니다.
그때 인쇄소에서 함께 일하던 경리 아가씨가 몇 년 동안 모았던 적금을 깨 빚을 갚아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양했지만 그녀는 도움이 되고 싶다며 막무가내로 돈을 건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사랑을 키워 나가다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동생을 걱정하는 제 마음을 알고 신혼집 방 한 칸을 동생에게 내어 줄 만큼 아내는 마음이 따스했습니다.
세 아이가 태어나고 아직 남아 있는 빚을 갚느라 허리가 휘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마냥 신났습니다.
그런데 빠듯한 살림에 보탬이 되겠다고 아내가 집 근처 갈빗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 행복에 금이 갔습니다.
곱게 화장하고 출근하는 아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밖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휩싸였습니다.
말없이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아내를 찾는 남자의 전화인 것 같아 가슴이 터질 만큼 화가 났고,
급기야 갈빗집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온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무 이유 없이 엄마를 의심하고 괴롭히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의심하는 저의 병은 점점 심해져 아내는 갈빗집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에도 제가 하루에 수십 번씩 집으로 전화를 하는 통에 아내는 슈퍼 한번 갈 수 없는, 감옥 같은 나날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결국 아내는 목숨처럼 사랑했던 세 아이를 포기하고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수없이 용서를 구했지만 이미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듯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기다리며 술로 세월을 보내는 사이, 세 아이는 여름옷을 입고 추운 겨울을 났습니다.
그리고 봄이 왔습니다.
어느 날 구석에 웅크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는 세 아이를 본 순간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제가 보고 자란 절망과 불안감을 대물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 인쇄소에서 일하다가 쓰러진 저는 간경화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다시 어마어마한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저만 바라보고 있는 세 아이와 병든 몸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지금은 주유소에서 일하며 조금씩 몸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올망졸망 제 옆에 누워 편안한 얼굴로 잠든 세 천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닥을 드러낸 쌀통도,
차갑게 얼어 버린 방바닥도 한순간이나마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철부지들을 키우려니 힘들 때가 많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참치김치찌개를 끓여 놓고 아이들을 깨우는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한 걸 보면
저, 좋은 아빠 맞지요?
언젠가 우리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오늘도 젊은 아빠는 열심히 뛰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