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내리 일곱을 낳은 엄마. 여덟번째는 아들일 거라고 확신했던 할머니와 아버지는
또 딸인 저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스무 시간의 모진 산고를 견딘 엄마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으셨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올망졸망한 우리들과 엄마를 버리고 집을 나갔고, 몇 년이 지나서야 다른 여자와 새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엄마는 억척스럽게 농사일에만 매달리셨습니다.
그러나 딸 여덟은 엄마 혼자 짊어지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언니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남의 집 식모, 식당 잔심부름꾼 등으로 제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맨몸뚱이 하나로 험한 세상에 던져진 언니들은 배우지 못한 설움이 얼마나 컸는지
막내 동생만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언니들의 도움으로 저는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로 올라와 전자제품조립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성질이 불 같고 술을 좋아하는 그 사람이 싫었지만,
거친 성격 뒤에 숨겨진 여린 마음과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날의 상처를 알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가족들의 반대를 이겨 내고 결혼할 때 저는 그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싶었고 또 그럴 자신이 있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게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결혼한 뒤 남편은 술도 많이 줄였고 성실하게 일을 해 직장 동료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마셔 온 술 때문에 간이 망가지고 당뇨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로 직장을 그만둔 남편은 좌절감으로 방황하다 다시 술을 입에 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냉장고, 가스렌지까지 떼어 내다 팔 정도로 노름에 빠져 들었습니다.
못하게 말리면 폭력을 휘두르고, 제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회사로 찾아와 돈을 가로채 갔습니다.
폐인이 다 된 남편이었지만 언젠가는 예전의 모습으로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가냘픈 희망을 가졌습니다.
제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기에 그 마음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핏줄도 남편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없었나 봅니다.
밤낮없이 울어 대는 아이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아예 집을 나가 노름방에서 살았습니다.
노름빚은 점점 늘어났고, 전셋집을 옮겨서라도 빚을 갚으려 했지만 이미 남편이 몰래 월세로 돌린 뒤였습니다.
심지어 분유와 기저귀까지 가져가 술과 바꿔 왔을 때는 정말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설움을 알기에 내 아이에게만은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언니에게 맡긴 채 이를 악물고 남편을 따라다녔습니다.
가게에 술을 사려고 들어가는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고,
노름방 구석에서 라면을 먹는 남편에게 따끈한 밥을 해 나르며 속옷과 양말도 깨끗이 빨아 문 앞에 놓고 왔습니다.
그러기를 6개월, 마침내 남편은 묵묵히 참고 기다려 준 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못난 남편 버리고 새 출발하라고 윽박지르던 남편이 그날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있겠느냐며,
이제는 술도 끊고 가족만을 위해 살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남편이 언젠가 또 다시 술과 노름의 유혹에 빠질 거라며 말렸지만,
제가 남편의 손을 뿌리치지만 않는다면 헤어나지 못할 유혹의 늪은 없다고 믿습니다.
요즘 남편은 어린이집 통학버스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일을 끝낸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를 무동 태운 채 퇴근하는 저를 마중 나올 때면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큰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까지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던 우리 세 식구가 또다시 험한 미로 속으로 빠지지 않기를,
이런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