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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살아 있음에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70)

2011-06-02 15:00


친구들이 대학입시에 한창 열을 올리던 고3 때, 나는 도박에 빠져 집을 나간 아빠 대신 돈을 벌어야 했다.
결국 자퇴서까지 내야 했을 땐 모든 게 끝인 것 같았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버텨 냈다.

난전에서 나물을 팔던 엄마는 아빠에게 맞은 후유증 때문인지 건망증이 심했다.
나물을 다 팔고 신바람이 난 어느 날은 돈주머니를 깜빡하고 두고 오는 바람에 밤새도록 눈물을 쏟았고,
옆 아주머니 소쿠리를 당신 것인 양 가지고 와 싸우는 일도 허다했다.

엄마의 건망증은 점점 심해져 집을 찾지 못하거나, 나를 못 알아볼 때도 있었다.
결국 엄마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월세 보증금까지 도박으로 탕진한 아빠 때문에 지금 사는 곳으로 쫓겨 왔을 때는
참고 참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며칠 뒤, 엄마의 소식을 듣고 아빠가 찾아왔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는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어린애처럼 반찬 투정을 하며 밥을 먹지 않았다.
더 잘 먹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처음에는 끼니마다 고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끔은 형편도 모르고 투정만 하는 엄마가 미워 모진 말을 퍼붓고는 뒤돌아서 울곤 했다.
예전에 엄마는 공부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라며 가끔씩 삼겹살을 구워 주셨다.
그때마다 생각 없다며 젓가락을 들지 않으셨는데….
"엄마는 고기를 싫어하는구나"하며 내 입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그 시절이 생각나 시린 가슴이 더 아렸다.

"엄마는 몇 십 년 동안 장사하며 힘들게 나를 키웠는데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지."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장의 한 옷 가게에서 일하던 나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네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저녁에 차비를 아낀 돈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사서 돌아올 때면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한 달쯤 전부터 시장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물건들이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몇 십 년을 같이 지내 온 사람들이라 파장하면 휘장 하나만 덮어 둔 채 돌아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내가 가장 일찍 시장에 나오고, 밤늦게 들어간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됐다.
결국 시장 아주머니들에게 머리채까지 잡혀 얻어맞았고, 5개월 치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고 말았다.

울면서 집으로 가니 엄마는 맨발로 뛰쳐나와 과자 봉지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엄마가 가방도 들어 주고, 따뜻한 밥도 챙겨 주던 옛 생각이 떠올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며칠을 넋 나간 사람처럼 있는데 엄마가 말없이 다가와 뭔가를 내미셨다.
초코파이였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다 으깨지고 녹아 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났다.

"정신을 놓은 엄마, 도박에 빠진 아빠.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만 이게 현실이라니…."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에 소주 한 병과 수면제를 앞에 두고, 잠든 엄마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 하루만 더 생각해 보자."

마음을 진정시키던 내게 갑자기 심한 두통이 엄습했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성 발작이라고 했지만 열이 내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며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죽으려고까지 했던 내가 막상 죽을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는 누가 돌보지…."

며칠 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인간이 참 간사하구나." 잠시나마 세상을 등지려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긴 나는 빵 공장에 취직했다.
아직은 일이 서툴지만 희망이 있어 즐겁기만 하다.
무엇보다 날마다 빵 한 봉지를 엄마에게 드릴 수 있어 행복하다.

"그래, 다시 일어나는 거야."

어쩌면 덤으로 얻게 된 이 세상, 늘 감사하며 기쁘게 살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