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불났어요! 불이 났다고요.”
3년 전 어느 새벽, 과음을 한 탓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간신히 받은 나는 비몽사몽이었습니다.
결국 직원 한 명이 집까지 달려와 나를 깨우고 차에 태워 공장으로 데려갔습니다.
공장에 도착하니 시커먼 연기만 가득할 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크고 멋진 공장은 아니었지만 군 제대 뒤 10년 동안 온갖 공을 들여 일궈 낸 것인데 화마에 휩싸여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자 세상이 끝난 듯했습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여기저기서 빚 독촉이 시작됐습니다.
거기에 직원들 밀린 월급까지 더해져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공장이 보험에 가입돼 있어 한 가닥 희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불은 자연 발생이 아닌 방화라는 겁니다.
보험사 측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내가 고의로 불을 냈다며 나를 몰아 세웠습니다.
공장에 불을 냈다는 의심을 받은 순간부터 일주일이 넘게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수천 번을 생각해도 불이 나던 날 분명히 술에 취해 잠들었을 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죠.
하지만 직원들조차도 나를 월급 떼어먹으려는 부도덕한 업주로 취급했고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자포자기하던 그때 같이 일하던 직원 하나가 공장을 헐값에 인수했습니다.
그는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다 타 버린 공장을 신속하게 재단장하는 등 새 사장으로서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이 난 당일 새벽 내게 술을 먹인 사람도, 화재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그 친구였습니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직원이 내게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공장을 인수한 그 친구가 내게 수면제 탄 술을 먹였고, 자신에게 방화를 사주했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 견딜 수 없었다며 잘못했다고 눈물로 호소하는데 가슴이 턱 막혔습니다.
당장 공장을 인수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런 사실이 없다며 잡아떼더니 나를 고소했고, 나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또다시 고통만 겪었습니다.
진실을 고백했던 직원마저 자기는 사주받은 적이 없다고 말을 번복했습니다.
쓴웃음만 나오더군요.
재판을 포기하고 더 이상 그 일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억울함이 밝혀지기만을 빌었죠.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아내의 패물까지 모두 팔아야 했던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고시원 쪽방에서 밤마다 가족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직 엄마 젖도 못 뗀 막내가 떠올라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어렵게 얻은 지하철 청소일은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있던 내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니 욕심이 생겨 저녁엔 동대문시장에서 음식 배달을, 새벽엔 자동차 세차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 겨우 3시간 자면서 종일 일하다 보니 일하는 도중 쓰러져 링거를 맞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하루라도 빨리 함께 살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어느새 빚은 원금보다 이자가 더 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힘든 시골 생활을 잘 견디고 있는 아내와 외갓집에서 엄마아빠 없이 동생을 꿋꿋이 돌보고 있는 큰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만약 그때 내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결국 내 인생도 망가졌겠죠.
내 행복을 짓밟은 그 친구도 공장이 망하는 바람에 지명수배 신세가 됐답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눈물 흘리며 사과한 걸 보면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날의 불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희망은 지금도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