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추운 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저는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 심한 열병을 앓고 난 뒤 소아마비에 걸려 제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에는 저를 돌봐 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고,
구멍가게를 하시던 아버지는 다른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저를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만 있게 했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 그리워 많이도 울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저는 형과 함께 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에서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개발구역이 되면서 땅값이 오르자 형은 저를 쫓아냈습니다.
어렵게 작은 방 하나를 얻었지만 저는 또다시 혼자였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싫어서 방 안에서만 지내던 저는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펜팔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를 주고받던 아가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도 몸 오른쪽에 마비가 있었는데 같은 처지다 보니 서로 의지가 많이 됐습니다.
결국 우리는 결혼했고 아기들이 태어나자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불편한 몸 때문에 아기를 안아 줄 수도, 밥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큰애가 세 살 되던 해, 실수로 젖병 삶던 물을 엎질러 아이가 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몸이 불편한 우리 부부 대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아이 몸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지요.
그 일이 있은 뒤 아내는 집안일을 뒤로한 채 종교에 빠졌고 끝내는 모아 둔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신발도 팔아 보고, 다시 구멍가게도 해 봤지만 번번이 돈만 까먹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자란 뒤에는 다방에서 배달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곳 주방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저를 좋아한다면서 함께 살자고 하더군요.
잘난 것도 없는 처지에 걱정이 앞섰지만,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고 저도 마음이 끌려 그녀와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새엄마를 잘 따랐고 그녀도 저를 업고 계단을 오르내릴 만큼 저를 아껴 주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그녀는 통장과 아이들 저금통까지 모두 가지고 사라졌습니다.
어떤 남자가 데리고 갔다는 주인아주머니 말에 저는 그녀를 수소문해 찾아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였고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왔다가 다시 남편 손에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자포자기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죠.
새로운 일을 찾던 중 장애인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돈을 빌려 차를 샀습니다.
그러나 제 다리를 본 손님들은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 버리거나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은 고등학생들이 칼을 들이대며 하루 일당을 모두 빼앗아 가기도 했지요.
그날 밤 서러움에 아이들과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큰애는 그 뒤로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몇 달 뒤에야 돌아왔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가, 집 나간 엄마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짐이 됐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다행히도 큰애는 잘 자라 주었고 군대도 다녀와 지금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저를 위로합니다.
낡고 허름한 집이지만 돌아올 곳이 있어 좋고, 몸이 불편한 아버지이지만 고아가 아니라서 좋다고요.
그런 큰애가 얼마 전 예쁜 아가씨를 데려왔습니다.
아들의 어릴 적 친구였는데, 어느새 숙녀가 되어 아들과 결혼하겠답니다.
이제 저는 두 가지 바람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과, 떠난 애들 엄마와 제가 앞으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겐 자식들이 가장 소중하니까요.
요즘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습니다.
얼마 전 며느리가 찍어 준 가족사진에서도 저는 활짝 웃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