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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나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바가지 | 추천 (0) | 조회 (281)

2011-06-11 09:38


“또 딸이가?”
딸만 넷을 둔 집안의 막내인 나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딸이라는 것도 섭섭했을 텐데 누구를 닮았는지 눈은 위로 쭉 올라가고,
코는 주무르던 찰흙을 던진 것처럼 납작했습니다.
게다가 두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은 곰보가 되었지요.

거울로 내 모습을 볼 때면 죽고만 싶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왜 날 이렇게 낳았어? 왜 곰보로 만들었어?”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자랄수록 자신에 대한 열등감은 심해져 얼굴을 숙인 채 허리를 굽히고 다녔습니다.

스물세 살 되던 해, 중매쟁이의 소개로 시집을 갔습니다.
시집간 곳은 매우 가난한 동네로 여름에 비가 오면 들에 강물이 들어와 먹을 것이 없었고,
산에는 나무도 없어 썩은 풀까지 땔감으로 써야 했습니다.
시댁엔 방이 두 칸 있었는데 시부모님이 하나, 먼저 시집 온 형님이 하나를 차지해 신혼 첫날부터 형님과 함께 잤습니다.

시어머니보다 무서웠던 형님은 중풍 걸린 시아버지 뒷바라지는 물론 힘든 일은 모두 나를 시키며 구박까지 했습니다.
끼니때마다 먹다 남은 음식을 주는 것도 모자라 일부러 멀리 일을 보내 굶긴 적도 여러 번이었죠.
서러움이 목까지 차올라도 참으며 못난 내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얼마 뒤 언덕 위의 허름한 집으로 분가했습니다.
생활이 좀 나아지길 기대했지만 남편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어쩌다 받는 일당마저 술값으로 다 써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집올 때 친정에서 논 팔아 마련해 준 돈과 옷까지 빼앗더니,
“니 못생긴 값 안 받아 오나?” 하며 친정과 언니들 집으로 나를 내몰았죠.
고생에 찌들어 결국 첫아이까지 유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남편과 살기를 10년.
며칠 동안 강에서 배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던 남편이 술을 마시고 강을 건너다 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는 동안 다정한 말 한마디 한 적 없고 나란히 걸어 본 적도 없을 만큼 차가웠던 남편.
그를 잃은 슬픔보다 덩그러니 남겨진 세 자식과 빚 때문에 울었습니다.

남편이 없어서인지 큰집의 구박은 더 심해졌고 이웃 사람들도 "못 생긴 과부"라며 무시했습니다.
내가 당하는 것이야 이력이 나 괜찮았지만 자식들이 괄시 당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에 아픈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했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버거웠습니다.
다행히 언니의 도움으로 둘째아들은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했습니다.
한번은 학교 갈 차비가 없어 곡식을 대신 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버스 기사가 아들을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 주어 고등학교도 졸업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보냈으니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하루는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을 찾았습니다.
노화가 20년이나 빨리 왔다며 의사가 혀를 차더군요.
쉬지 않고 일하기도 했지만 얼굴이 못났다는 수치심에 허리를 굽히고 다닌 것도 한몫한 것이었죠.

시간이 흘러 첫째와 둘째는 결혼했고 그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 지금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고 있습니다.
막내는 아직 젊으니 언젠가는 좋은 짝을 만나겠지요.
나를 닮아 말주변도 없고 박력도 없는 막내를 볼 때마다 못사는 집에 태어나 기죽어 지낸 탓이려니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나이 육십이 돼서야 알 것 같습니다.
스스로 키운 열등감이 내 삶을 더 힘들게 했다는 것을요.
이제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요.
앞으로 남은 삶은 소중한 나를 위해 당당하게 살아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