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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와서 좋은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기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내가 꿈에서만 그리던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하며 같이 웃고 맛있는 식사까지 한다.
나중에는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나 친구가 되니 이는 정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재수 삼수를 하면서 우상으로 여겨왔던 성태형님이나 공신 멤버들을 알 수 있게 된 것,
그분들이 내 세계에 들어오고 그분들의 세계에도 내가 들어간 것은 아직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그러한 신기한 사람이 된다는 것.
영국의 대표적 낭만시인이었던 바이런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유명해졌다’고 말한 것처럼 나도 자고 일어났더니 하룻밤 새에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을 만나면 학생들은 경이와 영광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기쁨에 가득 차 싸인을 해 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한다.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내가 또 어느 누구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한편으로는 매우 흡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겠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본다.
내가 정말 저러한 신기한 사람이 될만한 자격이 있는지.
적어도 내가 신기해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런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내 인생을 반추해보아도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굳이 눈을 씻고 찾자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던 그 용기와 열정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정말로 내 목숨을 걸고 미치도록 공부한 적이 딱 두 번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광기가 너무나도 심해서 사람들이 나를 광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니 다시 생각해도 지금의 나로서 혀를 내두를만한 과거의 내모습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아이였다.
애초에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나에게 가난이라는 굴레를 물려준 부모님에 대한 철없는 반항으로 이리저리 빗나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자고 떠드는 것은 기본 축에 들지도 못했다.
소위 일진이라는 친구들과 어울려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물건을 훔칠 때 망을 보거나 다른 학우들의 돈을 조금씩 갈취하거나 하는 것은 예사일이었다.
나중에는 공짜로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피시방에서 아저씨께 돈 안 받을테니 여기서 일 좀 시켜 달라하고 게임을 맘대로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뭣도 모르고 싱글벙글 가래침에 흥건하게 젖은 재떨이를 설거지 했던 기억도 있다.
부모님께서는 자기들이 다른 부모처럼 자식한테 많이 해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나에게 쓴 소리 한 번 안 했지만 그 철없던 나는 부모님께 대들며 도대체 부모님이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냐고 다짜고짜 따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나에게 운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부터 차를 고치시는 일을 하셔서 안 그래도 허약했던 터에 결국 그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신 것이다.
문제는 허리 손상과 신경성. 상황이 많이 심각해서 더 이상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 이후로 거의 반 년 동안 집에서 누워계셔서 일어나지도 못했고 어머니는 매일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우리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막내도 갓 초등학생이 된지 얼마 안되었고 3남매 모두 한창 성장할 시기인데 가족의 생계가 막혀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원래 집안일을 하시면서 종종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부업을 하는 정도였는데 이제 아버지께서 저헐게 누워 계신 마당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직업학교에 나가셔서 도배일을 배우시러 나갔다. 상황은 더욱 다이나믹한 국면으로 흘러갔다.
옆집 아주머니께서는 일을 하셔놓고서도 결국 보수를 받지 못했고 아는 게 없어서 그동안 일 해온 것을 받지를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 때 나는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이제 엄연한 가장이 되었다.
여동생 둘에, 우리 엄마와 몸을 제대로 가누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떠맡아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방황할 수만은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우리 식구들이 모두 슬퍼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보니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배우지 못해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지도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주머니를 보고서,
그리고 우리 동네의 수많은 이웃들이 모두 우리 집 내지는 옆집과 별 다를 게 없는 비등비등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우리 집도 벌여 먹여 살리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나의 힘들고 헐벗은 이웃 사촌들을 잘 살게 해주는 인생을 살아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가 중3 시절의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나는 달라져야만 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인생의 파노라마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참 그 동안 한심한 놈이었고 죽일 놈이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부정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시간적 여유가 내게 허용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도 시간이 너무 벅찼다.
나는 그 다음날 학교로 가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친구에게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 제일 좋은 과가 어디냐고 물었다.
“당연 서울대 법대지.”
“좋아. 난 이제부터 서울대 법대생이 되겠어.”
난 그날 이후로 서울대 법대를 위해 살기 시작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서울대 법대에 가서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가정도 지키고 이웃들의 안타까운 처지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과거의 내 생활과 이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난 달리지겠노라고 세상 앞에 당당히 외쳤다.
다음날부터 난 미치도록 공부했다.
우선 공부를 제일 잘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 친구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에게 공부법 하루에 하나씩 알려줘.그 대신 내가 가방을 들어줄게”
“아니 그정도까진 됐는데…
나는 고집불통으로 결국 책가방을 들어주는 대가로 공부법을 매일 하나씩 배우기로 했다.
아침에 새벾같이 일어나서 그 친구네 집 앞으로 달려가 그 친구가 나오기 만을 기다려 가방을 들어주고 등교길에 친구에게 공부법 하나를 듣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그 공부법을 매직으로 크게 크게 적어놓고 손바닥에도 적어놓으면서 머리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날 당장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그 친구 집까지 바래다 주면서 내가 오늘 공부한 것과 실천한 공부법 등을 피드백 받았다.
그리고서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공부법들 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떻게 수정할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공부하기 전에 공부법을 알아야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선 나는 너무 출발점이 늦다. 나는 생각했다.
나처럼 서울대 법대를 노리는 다른 경쟁자들은 이미 지금 전교 1,2등을 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내가 최소한 그들처럼 되기 위해선 그들보다 몇 배나 더욱 열심히 해야했다.
그러나 절대적 시간으로 승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도나도 24시간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세상에 공부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텐데 누구나 다 올백에 근접한 점수를 맞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것은 그들이 머리가 좋은 탓도 있지만 그들이 남들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나이 대의 대부분 공부 잘하는 학생은 공부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좋은 학원 고액 과외를 해서 손쉽게 터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원을 다닐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하루 하루의 한끼를 걱정하는 마당에 학원이라니.
그것은 내가 감히 쳐다보아서도 안되는 저 높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친구의 공부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 공부법들을 익히고 닦고 또 다시 점검하는 작업을 무수히 많이 거쳤다.
그 부분에서느 정말 무식할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덤볐다.
물론 대부분은 잘되지 않았다. 책상에 앉기만 하면 잠이 쏟아지고 한 시간을 참고 앉고 않기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머리는 이미 굳어 글씨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우리 가족들을 생각했다.
우리 불쌍한 이웃들을 생각했다.
내가 1초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그들의 앞날엔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미치도록 공부법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스펀지는 저리가라였다.
친구가 해주는 말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친구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 마치 신의 계시처럼 놓치지 않고 듣고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몸에 체화시키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공부를 하였다.
전교 1등 구본석.
학교에는 엄청난 충격의 물결이 흘렀다.
물론 중3 마지막 기말고사라 많은 친구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학교에서는 나를 반겨주거나 축하해주기보다는 나를 의심하기에 바빴다.
컨닝해준 친구를 빨리 대라면 선생님들은 나를 다그쳤다.
나는 내가 컨닝했으면 어떻게 전교 1등을 할 수 있겠나며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증거가 없어 전교 1등으로 굳어졌지만 내 인생의 첫 1등은 이렇게 축하보다는 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하면 되는 구나.
전교 1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였구나.
그렇다. 전교 1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그것을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체화시키고 모든 일념을 공부에 투자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면 공부를 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공부를 잘하지 않는 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과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
공부는 너무 재밌는 것이었다.
너무 재밌어서 잠도 오질 않았다.
공부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 얼굴에 온갖 행복한 표정이 떠나질 않았다.
공부를 하면서 ‘ㅋㅋㅋㅋ’, ‘ㅎㅎㅎㅎ’하면서 실실 웃음을 웃기도 하고 너무 재밌어서 주체를 할 수 없을 때는 ‘하하하’하면서 배꼽잡고 웃고 춤까지 추니깐 사람들이 날 미친놈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 여러 속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1설은 구본석 저 놈이 비 오는 길을 가다가 천둥 번개를 맞았는데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약간 이상하게 되어 머리가 좋아지면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것.
2설, 애가 원래 외계인이었다는 것.
3설, 악마와의 계약을 해서 공부를 잘하는 대신 영혼을 팔게 되었다는 것.
나는 이런 속설이 퍼질 때마다 너무 기뻐서 더 미쳐가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 환각이 생겨 공부하면서 혼자 즐겁게 대화를 하는가 하면 단어장을 들고 단어를 외우면서 방을 이리저리 굴렀다.
나의 공부와의 첫번째 교감은 이렇게 공부에 대한 즐거움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 나는 고등학교 가서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면서 이러한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점점 잃기 시작했고 1등을 뺏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3년동안 공부를 했다.
그래서 재수를 할 때는 공부에 지쳤다.
그리하여 공부에 손을 놓다보니 결국 재수에 실패하고 삼수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수능 성적표가 나온 날, 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
신발을 벗고 난간에 올라섰다.
내가 의지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실망스럽고 너무나도 미웠다. 왜 나는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난 죽어도 싸다.
세상사람들은 나를 비웃거나 동정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도 싫고 세상도 싫었다.
내 인생에는 낭떠러지만 있을 뿐 빛이 없었다.
난간에 서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했는가.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저 사람들은 얼마나 상심할까.
내가 이 각오로 공부를 한다면 못할 것이 있을까?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세상은 나를 원하고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저 세상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주어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 나만이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나만을 갈구하고 있다.
나는 난간에서 내려와 펑펑 울렀다.
그리고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공신닷컴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필패한다]. 이 글 하나가 내 인생을 바꾸는 글이 될 둘은 생각도 못했다.
전국 수험생들,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쳤다.
나는 1년 뒤에 반드시 성공해서 여러분 앞에 나타나겠노라고.
삼수를 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머리를 삭발하고 원래 옷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트레이닝복을 제외한 모든 옷은 버렸다.
트레이닝 두 벌만 챙겼다.
그리고 내 방 곳곳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자극 문구를 이리저리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정말 나는 벌레만도 못한 놈이었다.
공부시작한지 한달도 안되어서 다시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태와 의지박약.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리려는 마음을 다잡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앞에 약속도 했지만 결국 결론은 다시 원점인가.
너무나도 분하고 내 자신에 화가나서 텐트를 준비하고 대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배수진을 치자.
집에 들어가지 말자.
집은 내가 정말 만족했을 때 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자.
그래야만 난 집에 들어갔다.
그것이 삼수 시절의 나의 기이한 가출(?)의 시작이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공부를 했다.
하루 18시간 공부의 강행군.
공부가 끝이 나면 도서관 바로 앞에 텐트를 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여 먹고, 머리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대충 감았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없기에 머리 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은 최대한 아끼면서 공부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정말 미치도록 했다.
목숨을 걸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난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다.
죽음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죽느니 차라리 영광스럽게 공부하다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 공부하다가 죽어보자. 공부하다가 죽으면 최소한 서울대 총장님이 내 얘기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명예 입학이라도 시켜주실 것 아닌가.
지금까지 공부하다가 죽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1호가 되어서 새 역사를 다시 써보자.
과감하게 전사하자.
정말 죽을만큼 힘들 때 난 오히려 더욱 즐거웠다.
아 이제 공부하다가 죽을 시점이구나.
조금만 더하면 난 명예의 전당에 우뚝 서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맹렬하게 밀어 부치고 또 덤볐다.
불행인지 다행이지.
공부하다 죽지 않고 지금 여러분 앞에 이 글을 쓰고 있다.
공부하다 죽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 이유는 난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도 결국 두뇌의 근육 운동의 결과물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우리가 운동을 임계치 이상하면 모세혈관이 찢어지고 근육이 파열된다.
그럼 영영 그 근육은 못쓰고 마비되는 건가.
아니다. 그 찢어진 모세혈관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근육 세포가 자라난다.
그래서 근육은 더욱 불어나고 훨씬 더 튼튼해지며 더 강한 임계치를 갖게 된다.
그래서 근육운동이 효과를 발하기 위해서는 근육의 임계치를 무조건 넘겨서 근육을 찢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내 두뇌의 근육세포는 공부하다 죽으려는 내 의지 때문에 매일 매순간을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지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두뇌의 모세혈관이 끊어지면서 새로운 두뇌근육이 더 불어나고 두뇌의 용적으로 점점 늘어나는 것이었다.
두뇌의 용적이 늘어나면서 두뇌가 견딜 수 있는 인내력도 상승하고 더 많은 공부량을 소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내가 말했던 전교 1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삼수 동안 내 아이큐는 정말 많이 올라간 것 같다.
이 때 내 공부의 소화능력은 지금 생각해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Alvin Toffler의 [Revolutionary Wealth]를 구매해서 독파하기 시작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하루 6시간을 투자해도 겨우 2~3페이지를 넘기는 정도 였다.
그러나 매일 매일 죽음의 경계에 몰아치는 지옥 훈련을 한 결과 3시간도 안되어서 50페이지를 완벽하게 이해가 되면서 넘기는 수준이 되었다.
왠만한 국문판보다 더 수월하게 원서가 읽힐 정도니 인간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기세를 몰아 폭풍 공부를 했다.
여름엔 냉방이 되지 않아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그 땀이 내 머리에 흐를 때의 그 촉감이 너무 좋아서, 공부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의 그 상쾌함이 너무 좋아서 나는 그 혹한의 2008년 여름을 매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도 했던가.
그 해 여름에 육군사관학교와 경찰대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자만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시 쉼없이 몰아쳤다.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랬다.
공부함으로써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1분 1초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내 모습에서 천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백한다. 2008년 1년 동안은 그 어느 누구보다고 공부를 열심히 했노라고.
전 세계 엄청난 석학들, 하버드, MIT, 예일, 서울대 그 어떤 학생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고 치열하게 공부했노라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 공부와의 가장 아름다운 교감이었다.
나는 말하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어느 누구도 훗날 이 자리에 서서 수많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줄 수 있다고.
그 과정이 때로는 힘들고 거칠고 고난스럽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본 바로는 매우 행복한 경험이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처럼 신기한 사람을 만나고 또 자신이 신기한 사람이 됐을 때의 감정을 하루 빨리 공감하고 싶다.
여러분도 공신이 되고 싶은가?
그럼 공부를 즐기고 사랑하며 공부에 미치고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준비되었는가?
난 그럴 준비가 된 자들 옆에서 항상 그들의 열정에 응원의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