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은 언제나 웃음꽃이 만발하는 화목한 집이었다.
아빠는 건축 일을 하셨는데, 일이 고되서 그런지 술 드시는 일이 잦았지만 술주정을 하거나 술값으로 월급을 탕진해 엄마 속을 썩이는 일은 없으셨다. 오히려 술 한잔 하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두 손 가득히 과자를 사 들고 오는 자상한 아빠였다.
내가 일곱 살이던 어느 날, 아빠는 동네 아저씨들과 술 한잔 하고 있다며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아빠가 구멍가게에 있다는 말을 들은 난 한시라도 빨리 과자를 먹고 싶은 마음에 가게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와 부딪쳐 길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다.
곁에선 부모님과 동생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가족들을 위로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내 얼굴엔 하얀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고, 아빠 품에 매달리던 내 팔 한쪽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니까.
그 사고 이후 나는 외롭게 남은 팔 하나와 눈두덩의 5cm 남짓한 수술 흉터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의사 선생님은 실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하셨지만 몇 번에 걸친 수술에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는 내 가슴에도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반년 넘게 병원에서 생활해야 했던 나는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은 내 얼굴의 흉터를 보고 후크 선장이냐며 놀려 댔다.
한창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때에는 이보다 더 마음 아픈 일이 많았지만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하늘은 나를 또다시 좌절시켰다.
낮부터 친구 분과 술판을 벌인 아빠가 술을 많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빠가 돌아가신 곳은 십년 전 내가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몸이 불편한 내 처지를 비꼬는 친구 말을 듣고 아빠가 술로 화를 푸시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신 거라고 했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아빠의 죽음으로 우리 집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번은 남동생이 몇몇 친구들과 싸웠는데 집안이 든든한 다른 친구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억울하게도 동생만 처벌 받았다.
뭐든 열심히 하고 성실했던 동생은 부당한 차별대우로 인한 심리적 방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동생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직했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잊기 위해 나는 더 열심히 일했고 적금도 들어 조금씩 생활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루는 건강하던 엄마가 매우 피곤해 보여 병원에 가 보시라고 했는데,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오셨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당장 적금을 해약하고 엄마의 수술을 준비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동생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합의금까지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 친척분의 도움으로 동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엄마의 수술도 무사히 끝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내 나이에 네 살을 더 보태 놓았다.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내 스스로 만든 자괴감.
두꺼운 뿔테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늘 힘들었고, 행복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거기에 엄마는 암이 재발해 오늘도 무서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계시다.
울고 싶지만 난 울지 않는다.
내가 약한 마음먹지 않아야 엄마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실 테니까….
엄마가 늘 나를 믿어 줬듯이 나도 엄마의 희망이 되기 위해 더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