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덟 살 때부터 행복은 우리 가족에게서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고모부와 함께 했던 아버지의 사업실패가 원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고, 집 안 물건들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짐을 꾸리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돈 벌어 온다는 소리가 듣기 좋아 내 손으로 속옷과 양말을 챙겨드리며 해죽 웃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것도 모르고요.
그 뒤로 어머니는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와 도박판을 벌였습니다.
우리를 방에 가둬놓고 하루 종일, 또는 날을 새며 도박을 했죠.
유일하게 내가 방에서 나올 수 있었던 때는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1년이 채 안 돼 부모님은 우리 모르게 이혼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돌보지 않았고 남자들을 만나며 밖으로만 돌았죠.
우리 세 자매는 한겨울이 되면 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이불을 두세 겹 덮고, 전기마저 끊겨 촛불을 켜고 지냈습니다.
얼마 뒤 아버지의 빚과 어머니의 카드 빚으로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우리들은 삼촌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삼촌 집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에 5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세 명이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늘 숙모의 눈치를 봐야 했고 사촌동생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며 2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몇 년간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는 많이 늙어 있었습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왜 지금에서야 우리를 찾았냐는 원망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만났으니 행복했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죠.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세 번째 만난 아저씨와 살던 어머니가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새 가정을 꾸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작은 쪽방에 살던 우리를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새로 만난 남자는 술만 먹으면 집 안 물건을 부수고 엄마에게 폭력을 일삼는 망나니였습니다.
어리다는 것이 한이 되어 수없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남자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폭력은 날로 심해져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이 한 달의 반을 채웠습니다.
우리 세 자매는 결국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 또한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때문에 같이 살던 아저씨가 직장으로 전화를 하거나 술을 먹고 찾아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수차례 남자가 바뀌고 가정에 소홀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많이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힘들 때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10년 동안 여덟 번을 이사할 정도로 어머니 또한 힘들게 사셨으니까요.
얼마 있으면 우리 세 자매는 또 이사를 합니다.
언니와 내 월급으로는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빠듯해 더 작은 방으로 옮기는 것이죠.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을 보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끝내 대학을 포기한 동생이 안쓰럽지만,
언제 그렇게 철이 들었는지 동생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새벽까지 일을 합니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나도 직장이 있고, 동생들을 아끼고 보살펴주는 언니, 성실하고 의젓한 동생이 있기에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 나에게는 명절 때마다 만나는 아버지가 계시고,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언젠가는 함께 만나 살아갈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저앉지 않을 거예요.
온 식구가 한곳에 모여 다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웃으면서 최선을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