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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희망의 빛을 품고 꿈을 향해
바가지 | 추천 (0) | 조회 (311)

2011-08-03 08:18

내가 두 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일하신 아버지는 지방의 작은 마을에 주유소 하나를 사셨다.
하지만 그 지역의 석유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면서 주민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그곳 주민들 대부분이 석유 관련 일을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날마다 술에 취해 힘들게 식당에서 일하고 들어온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고,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와 번번이 부딪쳤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만취한 아버지가 오빠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미성년자인 오빠는 술을 사지 못하고빈손으로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런 오빠에게 식탁 의자를 던져 오빠는 한동안 팔에 깁스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오빠는 고등학생이 되자 베트남 아이들과 어울리며 술과 마약에 손을 댔다.
심지어 마약 거래를 하기도 했다.
결국 집까지 나간 오빠는 가끔씩 나를 찾아와 큰 액수의 용돈을 주고 갔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그 모습마저 볼 수 없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 문제아로 소문난 동생 때문에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셨고, 그 대가로 한인 타운에 작은 식당을 차리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단골손님 사이를 의심하며 식당에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
결국 어머니는 식당 문을 닫았고 틈틈이 번역 일을 하시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등록금이 필요 없어 나는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지만, 소풍이나 특별활동은 꿈도 못 꿨다.
또한 점심을 굶어야 했기에 점심시간마다 화장실에 숨어 있었고 반 아이들은 그런 나를 웃으며 놀려댔다.
동생마저 가난이 싫다며 점점 더 나쁜 길로 빠졌다.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학교 유리창을 깨는 등 온 동네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는 모든 기대를 내게 쏟았고 어려운 형편에도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주려고 노력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가 늘 불만이었다.
엄마와 대학 얘기를 하던 내게 “혼자만 잘 살겠다고? 네 주제에 무슨 대학이야!”라며 술병을 집어던졌고, 교과서도 몽땅 태워버렸다.
동생은 그런 아버지에게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며 대들었고, 아버지는 그날 동생을 쓰러질 때까지 때렸다.


다음 날 동생 몸에 멍이 든 것을 본 학교 선생님이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했다.
미국에서는 부모라도 절대 자식의 몸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머니와 나에게도 아버지한테 맞은 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우리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구속을 면한 아버지는 동생으로부터 100m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고 동생은 위탁시설로 보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속시켰고, 동생은 집으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내 연락을 끊어버렸다.


열여덟 살 때 나는 어머니와 한국으로 돌아왔다.
먼 친척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작은 식당을 차린 어머니는 한 남자와 재혼을 생각하셨다.
식당도 잘되어 모처럼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머니가 뺑소니차에 치여 크게 다치셨다.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그 사이 아저씨는 어머니의 식당을 팔아 자취를 감췄다.


지금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에서 지내고 있다.
그래도 난 요즘 희망의 빛을 보았다.
영어 선생님이 꿈이던 내가 영어학원 강사 자리를 얻었고, 어머니도 많이 좋아지셨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이모를 통해 오빠가 결혼해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예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이 벼랑 끝에서 내려다보니 그리 어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내게는 아직 아픔의 시간들을 꿈과 희망으로 다시 채울 수 있는 젊음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