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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위기의 강을 건너… "청춘은 아름다워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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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대중 선호 때문에 원작 소설이 널리 읽히는 경우는 흔하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근자의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작이나 영화 표제의 출처가 된 시가 그 때문에 널리 읽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번역의 적정성에 문제가 있지만 ‘초원의 빛’이란 영화의 표제는 긴 제목을 갖고 있으나 흔히 ‘영원불멸송(頌)’이라 불리는 워즈워스 시편에서 따온 것이다.
“초원(草原)의 눈부심(빛)과 꽃의 영광은/ 다시 찾을 길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뒤에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니”
안경을 쓴 여교사의 힐난을 받은 나탈리 우드가 시를 낭독하다 말고 교실을 뛰쳐나오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브룩필드의 종’이나 일본 영화 ‘스물네 개의 눈동자’와 같이 교사가 아주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역으로 나오는 교사가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일은 드문 것 같다. 대개 이해성과 융통성 없고 매력 없는 인물로 나온다. 그 이유를 캐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경관이 긍정적인 인물로 나오는 것이 드문 것과 똑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교사도 사회적으로 보면 권위와 권력을 대행하는 예방경찰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학생 시위가 한창일 때 교사도 필경 헌병 보조원이 아니냐 하는 무력한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 중부 캔자스주 소재 고등학교가 ‘초원의 빛’의 배경이다. 축구부 주장으로 교내에서 인망이 높은 워런 비티는 식료품상의 딸인 나탈리 우드와 좋아하는 사이이다. 모친에게 엄격한 순결교육을 받은 여학생은 남학생의 성적인 접근에 대해서 방어적이다. 집 안에 단둘이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에 가족이 돌아와 별일 없이 끝나는 장면도 있다. 남학생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상의를 하나 벼락부자인 부친은 명문대학을 나온 후에나 생각할 문제라며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연습에 열중하던 남학생은 폐렴으로 입원하게 되는데, 그때 알게 된 여학생과 우연히 성관계를 갖게 된다. 그런 소문이 나탈리 우드의 귀에 들어오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데, 워즈워스의 시를 읽다가 뛰쳐나오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후 집 안에서 칩거 생활을 하던 중 숲 속을 산책하다 어떤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다. 물속에 몸을 던졌다가 구조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가까스로 퇴원하고 정상을 회복한 나탈리 우드는 워런 비티를 찾아 간다. 그 사이 그는 명문대학을 나와 결혼한 처지요 아이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여주인공은 씁쓰레한 적막감을 느끼지만 이제부터가 내 인생이라는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녀의 상흔은 성숙한 인생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개성이 모두 생생한 박진감을 가지고 있다. 1929년 대공황 직전의 시기에서 시작해 지방 소도시의 성적 억압, 사회모순, 그 필연적 결과가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엘리아 카잔은 다시 한번 명감독으로서의 면목을 과시하고 있다.
흔히 아름다운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춘기 이후의 젊은 시절은 사실상 불안과 방황과 정신적 혼란의 시절이다. 조금 과장하면 아슬아슬한 위기이기도 하다. 낭비나 탈선의 유혹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는 위험한 시기란 점에서 그러하다. ‘청춘은 아름다워’를 쓴 헤세의 ‘크눌프’를 보더라도 그를 평생 떠돌이로 만든 것은 사춘기의 사랑 경험 때문이다. 우연한 풋사랑의 상처가 그를 무위도식하는 떠돌이로 만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나 그의 정처 없는 삶은 현실에서 모래 위에 세운 다락방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에서 발생한 성장소설은 흔히 남성 주인공의 자기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내면의 모험소설’이다. 영화 ‘초원의 빛’의 줄거리는 여주인공의 자기 형성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시련을 겪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상처 입고, 견뎌내고, 치유되는가 하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입시 지옥과 병역 연옥을 통과해야 하는 이땅의 사춘기는 어쩌면 곱빼기 위기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한 청년들의 수효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회의 건강은 훼손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장소설이 비단 사춘기 청소년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끊임없이 앞을 향해 달릴 것을 강요받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공황상태와 본연의 고독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 갈수록 이기적이고 가볍게 형성되는 인간 관계 속에서 영원한 것, 순수한 것에 대한 성인들의 갈망 또한
무시 할 수 없는 쟁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수많은 발달이론가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중년]을 일컬어 [제 2의 사춘기]라고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인간에게 의지하고 위로 받고자 하는 관계에 대한 갈증...이것은 아마도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계속 될 욕망과 추구가 아닐런지...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
사랑의 빛은 꺼지지 않고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어준다
그 사랑이 진실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