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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2020)을 보면서 ‘그때 그 사람들’(2005)을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 동일한 역사를 소재로 삼은 이상 두 영화 간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 먼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임상수는 블랙코미디의 전략을 가지고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의 관점에서 유신정권은 조직 폭력배 수준에 지나지 않는 소인배들의 집단이었으며, 각자의 욕망과 안위를 추구하는데 급급한 이들이 국가 전체를 쥐고 흔드는 권력의 소유자였다는 아이러니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자 희극의 원천이었다고 그는 보았다.
이와 같은 임상수의 재해석은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에겐 신성모독, 비판하는 이들에겐 인간적인 재해석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얻었다. 그러나 실화로부터 무게감과 아우라를 걷어내고 ‘그때 그 사람들’은 역사물에 색다른 접근의 가능성, 해석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그렇다면 우민호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를 모델로 한 김규평(이병헌)은 “우리가 이러려고 혁명을 한 것입니까?”라는 식의 대사를 입버릇처럼 외치며, 종국엔 박정희(이성민)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응징한다. 언론 시사 직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감독은 정치적으로 어느 쪽을 편들려 하지 않았으며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며 논란으로부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 해석의 책임과 오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믿는 그의 발언은 순진한 착각처럼 보인다. 등장인물의 입으로 혁명의 순수성을 강변하는 순간부터 감독은 스스로 5·16 군사정변과 18년의 군사독재에 일정 부분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김규평에게 고뇌하는 영웅의 아우라를 입히고 5·16을 ‘혁명’이라 주장하는 걸 두고, 우민호가 내리는 유신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 단정 짓는 건 다소 억울할 수 있다. 차라리 이건 실화와 실존 인물에 첩보물이나 누아르 같은 장르영화의 관습적인 폼을 입힌 결과 빚어진 부산물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면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영화의 관점을 사뭇 받아들이기 불편하게 만든다. 김규평은 박정희의 폭주를 만류하지만 그의 대사들은 은연중 군사정권의 정당성에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는 ‘내부자’의 한계를 노출하고 만다. 과거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남산의 부장들’의 관점은 15년 전 ‘그때 그 사람들’보다 현격히 퇴보한 감을 지울 수 없다.
‘마약왕’(2018) 때 곳곳에서 플롯의 구멍을 노출한 우민호의 스토리텔링은 이번 영화에서도 그다지 발전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 배우의 연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목적에 집착한 연출은 일부 장면 전환에서의 기교를 제외하면 평이한 드라마 수준에 그치고, 서사의 전개 방식 또한 이야기 단위로서의 시퀀스를 병렬적으로 나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장르의 폼을 잡느라 역사물이 지녀야 할 심도를 날려버린 이 영화에서 그나마 건질 점이 있다면, 실화를 알리바이 삼아 펼쳐지는 배우들의 호연뿐일 것이다. 감독의 역량이 채워주지 못하는 스토리텔링의 공백을 이병헌, 이성민, 김소진, 이희준, 곽도원 등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제 몫을 다하는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 앙상블이 메꿔버리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연출은 범작인데 연기는 걸작이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