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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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8
아직도 남아있는 일본식 마을 이름
1992년 요코하마 시청의 공무원인 고토 야스시씨가 발표한 논문 <경성의 행정구역
명칭에 관한 평양, 타이페이와의 비교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3개 도시 가운데, 서울만이 유일하게 일본이 만든'동(洞)
경계 체계'와 일본식 지명을 상당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땅이름
학회 배우리 부회장의 93년에 조사, 발표한 자료에는 서울시 전체 470여 개 동
중에 약 31.1%인 146개의 동 이름이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만든
이름이다」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아직도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14년 일본이 종래의 명칭을 무시하고 자기들 편의대로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이런 문제는 시작됐습니다. 가) 종로를 제외한 모든 대로는
통(通) 나) 청계천 이남의 남산을 중심으로한 지역은 정(町), 다) 그 북쪽은
동(洞)으로 단위 호칭을 정리하지만 일본식 지명을 쓰게 한 실질적인 이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부터 써오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경우 그 민족혼이 그대로
살아남아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었습니다.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일본식 지명을 보면, 일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지명을
만들었습니다. 두 개 이상 지명에서 한 자씩을 떼어 새 이름을 만든 '합성지명'과
아예 전래의 지명을 무시한 '일본식 지명'입니다. 우선 '합성 지명'으로는 조선시대
이름인 신촌(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첫 글자만 따서 만든 '신사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름은 절골(寺洞)인데 근처 관인방(寬仁坊)과 섞인 '인사동',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친 '청진동', 상평방(常平坊)과
연은방(延恩坊)
을 합친 '은평구', 그리고 예전에 소나무가 많아 솔고개로 불렸던 송현(松峴)이
옆의 수동(壽洞)과 합쳐진 지금의 '수송동'이 합성지명의 예입니다.
한편 전래의 지명을 무시한 일본식 지명으로는 먼저 '합정동'(조개우물골)이
있습니다. 이 합정동의 합(蛤)자는 조개 합자인데,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합(合)자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정식 지명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부르는 흑석동 '명수대'(明水臺)는 일본인 별장 이름입니다. 또한 중랑구는
중량구에서 중랑구로 바뀐 것입니다. 원래 량(梁)은 노량, 명량, 견내량, 초량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 돌, 들, 달의 이두식 표기입니다. 물가를 뜻하는 지명이고
다리나 수로 또는 고기잡는 발을 뜻하기 때문에 랑(浪)으로 바꾸면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이외에도 새남터길(沙南路)은 '한강로'로, 한강동은 한성의 남쪽이라는 이유로
'한남동'으로 바꿨습니다. 또한 태평로의 원래 이름은 관우물이 있었던 자리라 해서
'관정동'(管井洞)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던
곳이라
해서 '태평동'으로 바꿨습니다. 남대문 일대인 북창동과 남창동은 쌀 창고가 있던
곳이어서 각각 북미창정, 남미창정이라고 이름지어졌습니다. 그 후 '미'자를 떼고
정을 동으로 바꾸어 지금의 '북창동', '남창동'이 되었습니다. 여의도의 '윤중동'도
일본말입니다. 강섬의 둘레를 둘러쳐서 쌓은 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섬둑'
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더리(板橋)는 청계천의 흐름을 살핀다는
뜻으로 '관수동'(觀水洞)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의 우리 이름은
잣나무가 많아 잣골(栢洞)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숭교방(崇敎坊)의 동쪽에 있다해서
'동숭동'이라고 지었습니다.
지금 예를 든 마을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일본식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흔히
문화유산이라 하면, 왕궁이나 고려 청자 등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만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민초들의 진한 삶이 배어 있고, 그것이 면면히 대를 이어 생활
속에서 뿌리내린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민족의 문화 유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래의 지명도 그 지명을 통해 마을의 유래와 그에 얽힌 사연을 더듬어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우리의 문화 유산으로 생각을 해야합니다.
앞으로 이 땅에는 지역개발에 따라 새로운 도시, 공원, 아파트, 지하철역, 길 등
많은 시설물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곳에 무조건 기존의 지명을 따라하다 보면
더러는 현재 남아있는 일본식 땅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곳에 우리 조상의 얼이 밴 무형유산인 사라져 간 옛 이름들을 찾아 붙여 주고,
또 새로운 동명이 나와야 할 때에도 반드시 우리식의 땅이름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일제에 의해 이 땅에 남겨진 그들의 자취를
땅이름에서부터라도 없애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자료원, TBS교통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