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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회담
텐인치 | 추천 (0) | 조회 (250)

2019-06-25 16:19

오늘은 오랫만에  현재와 엣날 이야기를 섞어서 해보자. 예로부터 영수회담이란게 있었다. 서슬퍼런 유신시절에도 영수회담이란게 있었다. 유신시절 박정희-김영삼 영수회담은 나중에 밀실밀약설로 인해 김영삼이 피박을 썼다. 김영삼이 회고록에서 얘기를 했지만 다른 한 명이 이미 죽은 마당에 해명이 될수 없었다. 한마디로 박정희에게 김영삼이 이용당한거다. 전두환시절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야당 정치인이 지금도 우스운 유치송(식물야당인 민한당 대표)이었고 1985년의 2.12총선뒤엔 바지대표로 알려진 차명대표 이민우였기에 영수회담이란 의미가 완전 퇴색했다.

 

노태우시절엔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당대 거물과 김종필이라는 감초정치인으로 인해 4자대표회담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결국은 김대중을 쏙 빼고 나머지 3명이 이름까지도 친일스러운 민자당을 만드는 쾌거를 이룬다. 김영삼 시절엔 김대중의 잠깐정계은퇴로 인해 역시 차명대표인 이기택으로 인해 영수회담의 격이 떨어졌고, 이때부터 영수회담은 약간 의미가 달라졌다. 현안을 풀기위한 타협, 밀약의 장이라 아니라 야당대표가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한 도구로 변신했다. 이기택은 자신을 꼬붕정도로 여기는 김영삼과 동등하게자리에  앉고 싶어 영수회담을 제안하지만 김영삼은 항상 '기택이 마이 컸네'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수회담이 극도의 대립의 장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회창 딴나라당 대표와 김대중의 영수회담. 보통 영수회담을 하면 그래도 보따리 하나씩은 들고 가서 그걸로 선물하나 교환하고 나오는 만남의 장이었는데, 이회창은 자신의 대쪽 이미지가 마치 '노타협'의 이미지로 착각한 듯, 대통령에게 선물 하나 들고 들어가지 않는 영수회담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역대 가장 많은 8번이나 영수회담을 했다고 한다. 2002년의 마지막 영수회담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이회창을 이용하는 노련미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 뒤로 다 알다시피 박근혜 또한 자신의 대통령 후보 이미지를 굳히기 위하여 노무현정부시절에 끊임없이 영수회담을 제안했었고, 나중에 자신이 대통령 되었을때는 그런 자신의 작전을 야당대표가 이용하려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꾸준히 영수회담을 거부하는 반대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자신의 모가지가 오락가락하는 촛불혁명 당시, 여자로서의 연민을 느낀다며 접근하며 영수회담을 제안한 추미애대표의 손도 거절했다.

 

문대통령 시절엔 홍준표가 영수회담에서 예전 이회창을 연상시키는 딴소리만 하기 신공을 마구 발휘하여, 사시합격 출신자가 맞나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사법시험 출신자인 황교활이가 요즘 끊임없이 영수회담을 제안하고 있다. 교활이의 속마음은 여당의 대표도 오지 말고, 물론 3당, 4당, 5당같은 떨거지들은 나랑 같이 앉지 말고 오직 대통령만 나랑 같이 앉아서 회담하자고 제안한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는 위에서 부터 영수회담이 갖는 의미와 결과를 역사속에서 보았으니 충분히 알수 있다. 정치 헐랭이 나베꼬 하나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여 당내의 입지가 지랄같고, 대통령후보로는 갈길이 너무 먼 마당에 영수회담이라도 해서 자기 입지를 세워보려는 수작이란걸 이제는 국민들도 다 알고 있고, 멀리 해외동포인 나도 다 눈치까고 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대물들 틈새에서 눈치 하나로 빠구리 인생을 살아오는 눈치 100단 텐인치가 교활이의 속셈을 모를줄 알고.

 

교활아, 몇일전 뉴스에 보니 너네당 의원들도 약발 떨어진 영수회담 제안 하지 말고 리더쉽 발휘하라고 뒷통수 까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