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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이야기 2 - 인문학적 접근
lurkerman | 추천 (25) | 조회 (407)

2020-12-16 17:30

보통 도토리는 참나무속(참나무아속과 가시나무아속 포함)에 속하는 나무가 맺는 열매를 통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참나무속에 속하는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예외적으로 도토리라 싸잡아 부르지 않고 별도로 상수리라 부르고 있지요.
(그리고 독특하게도 졸참나무의 열매 역시 지역에 따라 굴밤(또는 꿀밤)으로 구분하고 는데 이에 대한 비밀은 다음 편에 풀어 봅니다.)

이렇듯 상수리는 이름부터 유별나게 도토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조금은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다 지역에 따라 상수리를 도토리중 으뜸이라 하여 귀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는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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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상수리와 도토리는 같은 말이자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상수리는 한자 표기어, 도토리는 순우리말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즉, 상수리는 그 자체가 도토리를 일컫는 것으로 단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 자나지 않다는 것이지요.
 
도토리가 매우 흔하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도토리는 모두 상실(橡實)이라 표기하여 별도로 구분치는 않습니다.
상실은 어원의 변천 과정을 거쳐 현재의 상수리로 변하지요.
 
학자에 따라 경기도 방언인 상시리에서 상수리로 변했다 정의하기도 합니다만 상시리 자체가 상실에서 파생된 것이니 구분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애초부터 상실은 상수리나무(橡木)의 열매를 뜻하는 것이니 기타 굴참나무 등에서 자라는 열매는 당연히 상수리와 구분지어 부른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은 의외로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그만큼 도토리의 역사(?)가 깊다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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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현존하는 의학서중 가장 오래되었다 알려진 "향약구급방"엔 상실의 차자표기(借字表記 - 중국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는 저의율(猪矣栗)로 표기되어 있지요.

저의율이란 말 그대로 돼지의 밤을 뜻하는 것으로 남풍현 교수 및 이덕봉 교수의 해서에 따르면 이는 "도톨밤"이며 이에 대한 변천과정의 흔적은 두시언해(도토바, 도톨밤으로 나타납니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토리의 뿌리가 되는 것이지요.

도토리는 훈몽자해(1527년)과 동의보감(1613년)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한자표기 중심으로 계속 상실로 표기하는 차이만 존재합니다.
 
물론 아직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니 대략적으로 이렇게 변천 과정을 거쳤음을 기억해 주시면 될 듯 합니다.

축약하자면...
 
상수리는 순 우리말인 도토리를 한자로 표기함에 따른 차이일 뿐 그 그 근본 뿌리는 같다...할 수 있을 터이니 상수리와 도토리를 현재처럼 굳이 구분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지요(상수리는 도토리가 아니다..는 아니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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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와 관련한 설화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선조와 관련된 것이겠습니다.

그 유명새만큼 휴양림 내의 숲해설가들도 이를 인용하여 상수리나무를 설명하는 경우도 많고, 환경부내의 사례본 등에도 제법 많이 인용되고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설화입니다.

문제는 과연 이 설화가 근거있는 설화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이 설화의 탄생 뒷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상수리가 아직까지 도토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서 고고히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도  어쨋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설화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임금님 수랏상까지 오른 도토리이니 상수리가 무조건 킹왕짱을 먹을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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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임진왜란 시절,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던 중에 곤궁을 채우기 위해 백성이 진상한 도토리묵을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해 한양 입성후 수랏상에 올리라 명하면서 수랏상에 올랐다하여 "상수리"가 되었다는 내용인데...


참인지 거짓인지를 지금부터 선조가 한양을 탈출한 그 행적을 쫓아 가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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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4월 14일
임진왜란 터짐.

음력 4월 30일
삼경(새벽 2시 ~ 4시 사이)에 말에 올라 한양탈출 하는데 황급한 와중에 비까지 내려 제대로 행궁을 차릴 경황은 없음. 말도 듣지 않는 아전과 군사를 꾸리기에도 버거워 겨우 몸만 챙기어 도망치는게 장땡이었음. 겨우 100여명만 따랐다 하니 당시 얼마나 아수라장이었는지 알 수 있겠음.
 
왕비까지 버리고 도주했으니 밥, 반찬 등을 제대로 챙길리 만무, 하루종일 굶다 시피 함. 다만 임진강에 도착 후 내오라는 술과 차가 없어 곤란하던 중, 의관이 챙긴 사탕 반덩어리를 물에 타먹음으로 당보충 만땅함.

음력 5월 1일
새벽 1시경 동파역(현재 해마루촌 인근 - 동자원 잔골 부근)에 도착하나 책임자인 파주목사, 장단부사 이미도주.
단, 먹을 음식과 술은 차려 둠.  이마저 먼저 도착한 호위무사들이 전부 긁어 먹은 바람에 선조는 잔반으로 끼니 떼움.
(대신 세자이하 모두 쫄쫄 굶게 된 것은 덤)
 
전날 점심부터 내리 굶은 상황임.
 
다행히 점심은 판관에서 해결함.

저녁, 드디어 개성도착.

여기선 그나마 강제(?)로 따르던 아전 및 호위 군사 대부분이 도망갔지만 풍덕군수 이덕형이 넉넉한 곡식을 바치니 백관들과 말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음(말까지 먹일 정도였음). 별도로 쌀 5석 진상까지 받은 건 덤.

그러나 한양을 코앞에 둔 왜구무리가 무서워 어디로 튈까 고민하던 중 유성룡의 의주, 윤두수의 함흥(4군 6진 방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와중에 황해감사 조인득과 서흥부사 남억이 군졸 수백명을 이끌고 당도하니 또다시 식량난에 허덕임.

다행히 남억이 짊어지고 온 식량이 충분했기에 이 대목까진 상수리가 등장할 여지는 없음.

음력 5월 3일
한양함락.

발등에 불 떨어진 선조 갈팡질팡 시작. 이 와중에 좌의정 유성룡 경질, 우의정 이양원 경질해버림. 마지막으로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죄를 물어 임잔강을 차단케 하고 본인은 평양으로 튐.

음력 5월 4일
개성을 떠나 해서로 피난하던 중 산골짜기에서 숨을 돌리며 끼니를 때우려하나 먹을 곡식이 없어 곤궁에 빠짐. 다행히 한 여인이 올린 조밥을 먹고 감동의 눈물을 쓰나미처럼 흘림. 조밥먹고 힘낸 선조, 열심히 피난길을 떠나 보산(寶山)의 한 방앗간에서 비박함.

요 대목에서 죄다 도망가고 따르던 이가 고작 10여명 남짓 남음(빗속에 굶주린 것은 덤)

음력 5월 5일
하룻만에 무려 140리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며(약 56KM 남짓) 봉산(鳳山)에 도착함. 여기선 주정(晝停)하였단 대목이 나오는 걸 봐선 간단하나 허기는 면한 듯 한 모양새임.

음력 5월 6일
봉산을 떠나 황주(黃州)에 도착하니 참다못한 황해감사 조인득이 행차가 너무 빠르고 백관과 군마가 굶주려 따라오지 못하거나 도망치는 이가 속출하니 속도를 늦추기를 간하나 피난길을 범하는(방해하는) 자는 엄히 다스리겠다 엄포를 놓음.(무조건 튀는게 장땡임)

음력 5월 7일
드디어 평양도착.

여기서 도착하자 마자 일단은 현미밥으로 겨우 허기를 면함. 그리고 평안 관찰사 송언신의 군사 3천의 호위 및 식량지원으로 겨우 꼴을 갖춤.
3일부터 내리 굶은 와중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함. 단 선조는 중간중간 곡기를 채우긴 했다는게 함정.

음력 5월 8일
피난길이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선조. 송언신 덕에 한시름 덜자 드디어 본격적인 밥투정 시작.

“어선(御膳)은 생물(生物)로 할 것이며 수량도 풍족하게 하라. 동궁 이하도 다 이 예에 따르도록 하라.”
(도토리묵 먹은거 맞나 싶은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는...)

 
음력 6월 11일.
평양서 삼시 세끼 잘 먹고 잘자던 중(선조실록 기록) 임진강 보루가 무너지자 영변을 향한 피난 강행.
단, 왕비는 함흥으로 보내 버리고 본인은 열심히 북으로 달려 안주에 도달함(무려 50km 구간임)
 
그러나 왕이 도착할리 알리없었던 안주목사 역시 끼니를 제대로 못 먹던 중에 왕에게 진상할 밥을 준비 못했단 이유로
곤장 40대를 맞음.(안주 백성은 이미 모두 도망가고 없었음)
 
음력 6월 12일.
영변 도착.
역시 백성은 이미 모두 도망. 그나마 남아있는 관원 몇몇을 통해 끼니를 해결함.
 
음력 6월 14일.
중국 피신 결정,
 
이후 박천(6월 15일) 가산(6월 16일) 도착으로 6월 18일 명나라 지원군 선발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팀.
그나마 박천부터 백성 및 관원들의 도움으로 곤궁을 면했으며 6월 18일부터 명나라 지원품으로 제대로된 식사가 가능해짐.
 
이 때가 양력으론 1592년 07월 26일 (일요일)이 됩니다.

(요까지 내용은 당시 날짜가 뒤죽박죽인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당시 지근거리에서 선조를 모시던(혹은 끌려가던??) 의정부우찬성이란 벼슬에 있던 정탁의 피난행록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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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행적도를 보면 개성을 떠난 5월 4일 부터 평양도착 5월 7일까지 등장하는 음식은 조와 현미 뿐입니다.
이것도 그나마 관원들이 모두 도망가지 아니하였기에 비교적 상세한 기술이 가능했기에 추적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조는 일제 강점기 시절, 미곡이 약탈당해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와중에도 먹지못할 음식이라 하여 외면하던 곡물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싶고, 현미는 또 지금에나 현미일 뿐 당시엔 감히 수랏상에 오르지도 못하던 것은 맞을 터이니 얼마나 궁핍했나 들여다 볼 수 있는 단면이겠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어가행렬의 피난상황을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던 평양 도착 무렵까진 도토리가 등장할 여력은 없었으며 만약 있었다면 그 이후인
평양탈출 ~ 명나라 지원군 도착 시점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무렵은 모두 도망가고 늙은 신하 몇명과 내시 몇명만 남은 상태라 중국과의 문서 교류조차 어려웠던 시점이었으며 당연히 어가행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할 사관조차 없었기에 무엇을 먹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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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도토리가 여무는 시점은 빨라야 양력 9월 초입니다. 그 조차 상수리가 등장할 시점이 아니었기에 오롯이 "상수리"만 진상할 수 있었던 환경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지요.

다만 도토리를 말려 가루를 내어 보관타 수랏상에 묵으로 올렸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 또한 도토리 자체가 구황식물로 매우 중요한 식량이었다는 점에서 미식적 관점으로 6대장 도토리를 각기 구분해 가루를 내어 보관할 인력이나 여력이 없었던 당시 상황을 놓고 본다면(현재도 각 열매마다 가루를 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일 때 한할 뿐입니다) 오롯이 상수리만 식탁에 올랐을리는 만무했겠지요.

따라서 수랏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리"가 되었다는 설화는 참이 아닌 거짓인 셈이니 상수리를 도토리라 부르지 못하고 상수리라 부르는 것은 태생이 같은 도토리들 로선 허균의 마음과 다름없는 참으로 참담한 심정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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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도토리 즉 상실은 아주 주요한 구황식물이라 적었습니다.

이는 절대평야가 매우 부족했던 국토 요건과 외침이 많았던 국내 요건 등이 겹치면서 식량이 태부족했던 이유 등으로 어쩌면 주요 식량이라 규정지어도 부족치 않을 곡식의 역할을 해왔던 것을 의미합니다.
 
훗날 구황작물의 대표격인 고구마, 감자 등이 들어 오기까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식량 역할을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 태종편 22권에(태종 11년 9월 7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튀어 나옵니다.

의정부에서 천(아마 청계천인 듯)을 개간할 것을 아룁길 오는 10월 ~ 명년 2월에 공사하겠다 하자 태종 왈 10월은 상수리를 주울 때이니 그 시기를 지나 2월에 시행하란 교시를 내리지요.
乙丑/議政府啓開川之事。 啓曰: "來十月明年二月中開川。" 上曰: "十月, 正拾橡實之時, 須待二月施行。"

이 외에도 도토리를 얼마나 중히 다스렸는지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빼곡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세종때는 해충으로 도토리나무가 죽어가니 해충을 구제하라... 도토리나무를 심어 백성을 구제토록 하라 명하기도 합니다.

성종에 이르러서는 도토리 20만석으로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토록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자 표기어 "상실" - 순 우리말 도토리는 신석기 때부터 한반도 내 유적지 곳곳에서 빠지지 않고 주요한 먹을거리도 등장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가을만 되면 본능적으로 찾는 식량 역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선 아예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를 개량한 고수확 신품종 묘목을 보급하는 상황이니 이래저래 국내에서 만큼은 돼지의 밤(먹이)가 아닌 사람과 뗄래야 뗄수 없는 귀중한 식자원이 되겠으나...

그릇된 설화때문에 상수리만 대접받고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도토리들에겐 암담 그 자체이었겠지요.

 
무엇보다 태종의 교시에 상수리를 주울 때는 음력 10월이다 하였으니 선조 피난시기에 상수리와의 조우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할 수 있을 터입니다.
 
이렇게 태종을 통해 상수리 설화는 참이 아닌 거짓임을 증명한 셈입니다.


다음 편엔 그릇된 설화로 무장한 상수리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는 시간으로 식품영향학적 측면에서 접근토록 하겠습니다.
(부제는 졸참나무여 궐기하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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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1) 서유럽에서도 도토리는 돼지의 먹이로 사용하고 있으며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가 잡내도 덜하고 육질의 단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지요. 국내에선 현재도 멧돼지의 주요한 식량자원이기도 합니다.

덧 2) 신석기 유적엔 거의 빠짐없이 도토리가 등장합니다. 심지어는 탄닌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유구 또는 저장고 등도 함께 발견되고 있으니 고래로 도토리는 인간의 생존과 매우 밀접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덧 3) 상수리나무의 열매이니 상수리라 부르는 것이 옳다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굳이 다른 참나무들의 열매는 구분치 아니하고 도토리로 싸잡아 부르니 이 또한 타당치는 않겠습니다.
 
에초에 상수리가 열리는 상목을 상수리라 부를 순 없었던 것입니다. 상목 뿐 아니라 참나무 6대장 모두가 상실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덧 4) 상수리나 도토리나 무슨 차이가 있겠냐만 서도 이러한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시각도 존재할 수 있단 의미 정도로 해석해주심 될 듯 합니다.

덧 5) 향약구급방은 고려 경종 23년인 1236년에 처음 발간되어 조선 태종때인 1417년(태종 17년) 7월경상도 의흥현(義興縣: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에서 중간한 것중 간본 1부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에 비장되어 있습니다.
 
덧 6) 상수리가 유독 도토리중 크기가 크다보니 도토리 중의 제왕이라하여 상수리로 부를 순 있겠습니다.(어원과 기록과 상관없이)
그럼에도 상수리가 도토리 중의 으뜸은 아닙니다.
 
비슷한 크기를 보이고 있는 굴참나무 도토리가 있지요. 그리고 자생지역의 생태환경에 따라 오히려 굴참나무 도토리가 더 큰 경우도 있기에 상수리만 유별나게 대접 받을 인문학적, 식물학적 근거는 없다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지역에 따라 굴참나무 역시 상수리로 묶어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도 상수리, 저것도 상수리가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