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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을 보고 다시 확인해 보는 토왜들의 뿌리!
hyeoni | 추천 (30) | 조회 (663)

2021-08-11 02:45

6.25 이 전쟁 이후, 나라는 반으로 갈라졌으며 산업시설 약 80%가 파괴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국민소득 2년치에 달하는 재산이 모두 사라졌고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일본인들이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는 와중에도 지켜오고 되찾아왔던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거나 실종되었다.

 

임의로 그어진 선은 곧 사라질 줄 알았으나 그 선은 고착화 되어 일명 3.8선이라는 이름으로 

분단의 상징되었고 사람과 정치, 경제, 문화, 역사까지도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빠르게 복구해 나갔다.

 

그렇게 한국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될때 옆 나라 일본은 달랐다.

2차 세계대전으로 모든게 사라진 일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수혜를 입었고 

빠르게 발전의 기틀을 마련 한다.

일본은 그렇게 빠르게 발전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전범재판에서 

살아남고 정계에서 물러난 이들이 다시 일본 정계에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정계는 재편된다.

 

이후 여유를 가진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들의 오랜 식민지였던 옆 나라로 눈을 돌린다.

 

처참히 무너져 내려 천천히 복구하고자 하는 한국은 그들에는 더 없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한데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인들이 자신들을 전범국으로 

낙인을 찍어놔 다시 몸을 움직이면 이제 막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한국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그날로 일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게 

불보듯 뻔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지만 참아야 했다.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수 있으니...

 

어떻게 하면 다시 한국을 자신들이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군침을 흘리고 

입맛을 다시던 그때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남과 북에서 하는 것을 보며 자신들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한국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경제를 먹겠다는 것.

 

미국보다 한국과 가깝고 게다가 자신들은 미국의 편이니 미국도 반대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원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정부는 자신들이 돈을 지원하면 그걸로 전후 복구로 사용해  

치적으로 홍보하면 더 오래 대통령을 유지할 수 있으니 당연히 받아 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들어 맞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아예 거절하고 이후에는 답변 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을 설득하고자 한다.

과감히 자신들도 한국을 복구하는데 거들겠다며 돈도 지원할 수 있다며 

미국에 특사까지 보냈다.

 

하지만 미국도 처음에는 당연히 그들이 하려는 것이 뻔히 눈에 보였으니 거절했으나 

계속된 로비 끝에 미국을 통해 한국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 만큼은 흔들리지 않았고 4.19 민주혁명 이후 

들어선 장면 내각 또한 당연히 반일로 고수를 했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의 돈과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겠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당시로는 일본 또한 감당이 되지 않는 

막대한 배상금을 내야만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이 

초대 정부부터 장면내각까지 그들의 입장이었다.

 

이후, 장면내각은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그걸 밑천 삼아 경제개발 5개년을 발표한다.

포기하자니 아쉽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도 탐나는 먹잇감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포기하려 했었지만 놓지 못하고 기다리고 한다.

 

하지만 1년 뒤 상황은 급변한다.

바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국도 당황했다.

소련의 북한 지원으로 한국보다 북한이 먼저 전쟁의 참화가 사라져가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한국 정부에서 끊임없는 설득 끝에 이듬해 부터는 

미국이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원조를 지원하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일본은 반일정부가 아닌 다른 정부가 들어설 수 있으니 호재라 생각했지만 군이 일으킨 쿠데타.

즉, 군은 오히려 더 반일정부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들에게는 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1961년 11월 11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으로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면서 

곧장 미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을 방문하는데 이때 일본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신이 주신 선물과도 같은 기회로 생각하고 공항에서부터 그가 떠날때까지 극진히 영접한다.

 

 


▲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으로 박정희가 일본 공항 도착한 모습.

 

 

그날 저녁 만찬회에서 박정희는 자신이 직접 초대한 한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만주 군관학교의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 

 

 


▲ 만찬장에서 박정희와 나구모 신이치로가 만난 모습.

 

 

박정희는 그를 만나자 "나구모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에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구모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 주셨습니다." 

라고 얘기했고 예를 갖춰 깎듯이 대하며 심지어 큰절까지 올렸다.

 

아무리 쿠데타를 일으키고 올라간 자리라고는 하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수치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 일본 방송을 통해 생방송으로 박정희와 나구모 신이치로가 만난 모습.

 

 

이 모든 것은 일본 국영방송인 NHK를 통해 생중계 및 보도 되었고 만찬장에 오면서도 

믿지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일본의 정치인들은 박정희를 보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만찬장에서 이 모든걸 지켜보는 사람 중 훗날 '아베 신조'의 외조부가 되는 

인물이기도 한 A급 전범이자 극우파의 대부 '기시 노부스케'도 있었다.

 

 


▲ 만찬장에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처음 만난 모습.

 

 

이 만찬장에 모인 인물들과 박정희가 만난 일본 정치계의 인물들은 모두 극우파들이었고 

이들은 한국과 국교가 정상화되자 한국의 개발에도 적극적이었고 많은 돈을 한국에서 가져간다.

 

극우들은 이 만남에서 박정희를 무조건 잡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더욱 적극적일 수 밖에 없었고 박정희를 믿을 수 있는지 

자신들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지 무엇을 내어줘야 자신들의 꿈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참고로 박정희가 일본에 방문하기 전 극우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극우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했다. 

 

그는 극우파들의 거물 '요시다 시게루'

 

 


▲ 일본 극우의 거물, '요시다 시게루'

 

 

"우리 일본은 이토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재차 조선 땅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았다. 

그만큼 박정희를 만나기 전까지 그들에게 있어 박정희는 불안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 존재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박정희는 그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말 그대로 그는 너무나도 쉬운 존재였다.

 

만찬장에서 보여준 박정희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랄 수 밖에서 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엄연히 한 나라의 지도자였으니 말이다.

이내 모두가 흡족해 하며 박정희를 향해 진심을 다해 박수를 보냈고 만찬이 끝날때까지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앞서 보인 모습을 통해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를 통해 극우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박정희를 요정으로 초대했으며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으며 

박정희도 취기가 오르자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이렇게 얘기한다.

 

"혁명(5.16 쿠데타)을 했을 때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명치유신의 자시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 기시 노부스케가 박정희를 위해 요정으로 초청한 행사.

 

 

훗날,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이 만남에서 자신이 처음 본 박정희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젋은 군인들이 정치와 경제를 몰랐으며, 일본 정치인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왔었다."

 

 

이 만남에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며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택했고

기시 노부스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단순한 만남이 아니였다. 

일본 극우파들에게 있어 박정희는 자신들의 꿈을 빠르게 실현시켜줄 수단이었고

박정희에게 있어 기시 노부스케를 필두로 하는 일본의 극우들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오랫동안 유지시켜줄 수단이었다.

 

 

 

 

 

그리고 몇 십 년만에 해제된 '미 CIA 보고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 미국 CIA 보고서 中

 

 

 

 

 

 

 

1965년 6월 22일, 마침내 한일국교정상화라는 명목하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다.

이날은 명실공히 일본 극우파들의 또 한 번의 승리였으며, 한국에서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이

군부독재 시작인 3공화국부터 마지막 5공화국에 이르까지 군부의 막후로써의 

시작을 알리고 포문 연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