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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이 승리한 봉오동,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만행!
hyeoni | 추천 (26) | 조회 (676)

2021-08-19 07:42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대한독립 만세!'는 불과 몇 십 분뒤 광화문을 시작으로 수 개월간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벌이는 만행과 나라를 빼앗긴 설움들이 모여 참고 참았던 한반도 울분의 

만세소리는 전국의 수 많은 조선인들을 깨웠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의열단, 

신흥무관학교 등과 많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으며 농민과 어민 등 직업 불문, 

성별 불문, 나이 불문하고 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총과 칼을 들고 

일제와 맞써 싸우는 계기가 됩니다.

 

시간이 흐른 1년 뒤인 1920년 6월,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간도군민회군, 군무도독부, 신민단과 함께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당시 일제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최정예들을 모아 편성한 월강추격대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끌어들여 그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대승을 거둡니다.

이 승리는 독립운동 역사의 첫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봉오동 전투에서 한껏 기세가 오른 독립군들은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이 주축이된 청산리에서 보복전에 나선 일제와 

다시 한 번 맞붙어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게 청산리에서 또 한 번 대패를 하고 돌아간 일본군은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 이유로 이참에 독립군들의 활동기반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를 실행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름니다.

일본군에 내려진 명령, "조선인 저항세력을 초토화 하라."

 

 

조선인 사회에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동시에 조선 독립군의 모체인 항일단체와 

학교, 교회 등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합니다.

 

현재는 연변조선족자치구인 용정에 위치한 아주 작은 산비탈에 만들어진 마을인 장암동.

1909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던 당시 이주해간 조선인들이 직접 맨손으로 

하나 하나 개척해 만든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그들이 들어닥치기 전까지는....

 

청산리 대첩에서 패퇴를 하고 물러갔던 일본군은 다시 군을 편성하고 

그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들어닥칩니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불을 지르고 성별, 나이 등 그 어떤 것도 상관 없이 

보이는 족족 무차별적으로 총을 갈겨댔고 쓰러진 사람들 위로 말을 타고 지나가며 밟고 

총을 맞아 이미 죽은 이들에게도 칼로 난도질까지 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들은 그런 잔혹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웃거나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암동에서 일본군이 학살을 이어가고 있던 이때 간도지방 곳곳의 

크고 작은 마을에서도 장암동 마을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간도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간도 참변으로 약 2500여개의 민가와 30여개의 학교와 교회가 불에 탔으며 

무려 최소 1만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단 하루만에 끝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일간 매일 수 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고통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은 생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 게다가 청원을 강요했습니다.

 

"장암동 주민 십여 명은 자발적으로 연이어 서명하여 귀순의 뜻을 표하고 

기존의 마을사람 일동이 이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했음을 사죄했습니다. 

죽은 자는 그들이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징이므로 불가피한 것이었고 

우리 군대의 토벌 행위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는 것이 일본군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간도지방 곳곳에 학살을 하며 교회도 불태웠는데 이들 교회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차후에 그들이 목격한 것을 세상에 공개했을때 후폭풍을 대비해 

위와 같은 반성과 청원을 쓸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자신들의 공식문서에 학살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의 치안을 흐트러 뜨리는 불령선인들이었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자위적인 

행위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입니다.

 

간도 곳곳에서 일본의 만행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군들이 말한 것은 모두 

거짓이고 심지어 자신들과 몇 달 혹은 몇 주, 몇 일 전 교회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방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잡아갔으며 그들이 떠나고 마을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그의 목은 땅 속에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그러한 학살을 벌이면서도 일왕의 생일인 천장철을 기념했습니다.

일왕의 생일을 기념한다던 그 날, 장암동에서 미국인 선교사는 일본군과 마주쳤는데 

그는 술에 취한 모습에 술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