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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거리.
텐인치 | 추천 (33) | 조회 (916)

2022-06-10 19:35

아주 옛날, 30년이 훌쩍 넘은 그 때, 지방에서 상경한 나는 사글세값 싼 동네를 찾아서 가다보니 어찌어찌 하여 그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산게 큰 도움 된것은 뭣도 모르고 세대주로 주민등록 옮기고 가입한 청약부금-청약저축, 그게 훗날 내게는 재산형성의 첫걸음이 되었지만. 그 동네는 못사는 동네이다. 정말 못 사는 동네이다. 하긴 당시에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집, 집이 아니라 그 방에 방 한칸 빌려서 세들어 살게 되었다.

 

그 당시엔 결혼한 사람들도 돈이 없어 그렇게 방 한칸, 5만원짜리 방에 세들어서 신혼살림 차렸다는데, 나는 거기서 자취생 생활을 시작했다. 월 15~17만원을 주면 하숙을 할수 있지만, 그 돈이 아까와서 자취를택했는데, 그래도 자취는 자취 나름데로의 재미가 있고 정취가 있었다. 방 한칸이래도 그 옆에 부엌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밥도 짓고 밤에는 목욕도 할수 있고.

 

그 방에서 정말 빠구리도 많이 쳤다. 지금의 아내이자 당시 여친은 거의 와서 살다시피 했다. 1주일에 두세번은 와서 밥먹고, 빠구리치고, 티비보고. 돈도 없는 주제에 당시에 36만원이나 하는(당시 대졸 직장인들 월급이 35만원였으니) 오디오 셋트를 36개월 할부로 구입했고, 티비를 워낙에 좋아해 주인집도 14인치 티비보던 시절에 꼴에 16인치 티비를 덜퍽 할부로 구입하고. 그리고, 매달 LP판 하나씩을 사서(당시에 1000~1200원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 음악을 듣느라 까만 밤을 보내고, 주말을 보냈다. LP판의 잡음을 뚫고 나오던 베토벤의 교향곡, 폴모리아 악단의 경음악. 리처드 클레이더맨의 피아노연주곡. 지금 생각하면 가난했어도 그때가 행복했나 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장 많이 듣는 곳이 폴모리아 오케스트라와 리처드클레이더맨이다.

 

(그때 산 LP판은 어디를 이사가던 들고 다녔는데, 이민오면서 LP를 좋아하는 동료에게 선물로 줬다. 그 친구는 심봤다고 좋아했다. 원판이었던 아침이슬 양희은, 트윈폴리오, 폴모리아등등 귀한 음반이 제법 있었다. 고등학교때부터 모았던.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쉽다. 그걸 그냥 가지고 올걸)

 

집에 오느라 버스에서 내려서 고갯길을 500미터쯤 걸어 올라왔다. 꼬불꼬불 골목길, 당시 못사는 동네는 길도 정말 꼬불꼬불했다. 날씨가 따뜻하면, 친구들과 술을 한잔 마시고 거기를 올라오다 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 이건 나같이 욕실도 따로 없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 딸린 부엌에서 목욕하는 소리이다. 그런 동네는 허술한다. 대문도 허술하고, 또 길가로 창문이 나와 있는데, 그 창문도 허술하고.

 

그 틈으로 보면 '오!!! 심봤다!!!" 젊은 처자나 새댁이 목욕을 하고 있는거다. 뽀얀 살결에, 탐스런 젖가슴에, 탐스런 엉덩이에, 그리고 보지에 나있는 검은 털, 보기만 해도 좆이 발딱 서는 모습이다. 그때 나이야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옆에 있는 여자 냄새만 맡아도 좆이 바짝 서고, 버스에 서있는 여자의 겨털만 봐도 좆물이 질질 흐르던 시절인데, 그렇게 발가벗고 목욕하는 젊은 처자의 나체를 보니 이건 좆물이 질질 새는 정도가 아니라 콸콸 쏟아지는 정도다. 여름철이면 야심한 밤에 이런 장면을 기대하고 밤마실을 다닐 정도다. 그러다 가끔 아저씨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이런 씨발.

 

그렇게 꽁꽁 묶어둔 정력은 여친이 찾아오면 마음껏 풀게된다. 일요일이라도 되어 아침부터 찾아오면 하루종일 방에서 빠구리 치는게 일이다. 식사는 동네 짜장면 집에 시켜먹어도 된다. 전화가 있을리 없으니 주인집 전화를 잠깐 빌리러(이때 20원이나 50원짜리 동전 하나 정도는 남겨둬야 전화를 자주 빌려주고, 나찾는 전화오면 바꿔준다) 갈때만 옷을 입고 있을 정도다. 하루종일 빠구리를 쳐서 좆대가리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여친 보지는 벌겋게 부어오르고. 하루에 10번 빠구리친 적도 허다하니 좆껍데기가 훌러덩 벗겨지지.

 

피임은? 콘돔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여친덕분에 항상 맨자지로 쑤셨다. 대신 가임기에는 빨리 빼서 여친의 배나 등에, 때론 재수가 좋으면 입에 좆물을 싸 댔다. 결혼하기전 빠구리 숫자가 이런식으로 세어봐도 몇천번인데(거의 7년간 1주일에 2-3번 같이 자면서 기본 5번이상은 해댔으니) 혼전 임신 안한거 보면 정말 신기하다.

 

임춘애가 금메달 딴다고 난리칠 때도, 올림픽 개막식한다고 어린애가 굴렁쇠 굴리며 뛰어갈때도,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던 것을 티비로 보면서도 내 자지는 여친 보지 안에 들어가 있었고, 심지어 지강헌의 총성이 울리던 그때에 나는 여친 보지에 시원하게 질싸를 했다. 그날은 안에 싸도 된다고 해서. 밤샘을 하고 늦잠을 자면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던 여친이 점심시간에 김밥이나 먹을 것 싸가지고 나를 깨우러 와서, 깨우긴 쥐뿔, 지도 한코 생각나서 오는거지, 도시락은 뒷전이고 낮걸이로 시원하게 한판 박아대고.

 

그러다 보니 재밌는 일도 많았다. 주인집 꼬마(당시 초딩 5나 6학년 정도??)가 알건 다 아는 고수였는지, 일요일에 여친이라 열심히 빠구리를 치고 있는데 지 친구들이랑 같이 방안을 옅보더라. 애들을 뭐라하고 쫓아낼수도 있지만, 변태는 변태인지라 애들 보라고 계속 박고. 여친에게 박으면서 그 얘기 해주니 애들 잘보이게 해줘야 한다며 애들이 보는 방향으로 엉덩이를 돌리고 뒷치기로 박으라고 하고.

 

또 한번은 여친이랑 밤에 실컷 박고 나서 씻어야 하는데 귀찮긴 하고, 그래도 여친은 보지에서 좆물 줄줄 새면서 몸에서 좆물냄새 남자 냄새 풍기며 버스타고 갈순 없고, 그래서 씻어야 하는데, 옷 입고 나가기엔 그렇고(왜냐고? 여기 저기에 좆물을 발사해 몸이 온통 좆물 투성이니) 그래서 이 여자가 대차게 홀라당 벗고 부엌으로 가는데, 단칸방이 다 그렇듯, 부엌으로 가려면 문을 열고 신발신고 방문에서 약 1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부엌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 씻어야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주인집 아저씨가 화장실(변소간) 간다고 나왔다. 우리 빠구리 훔쳐보던 초딩놈의 아버지, 그 아저씨는 그날 심본거지, 여친 홀라당 벗은거 다 봤으니.

 

이제 그 시절 그 동네를 설명하자면 대로변(마포귀빈로라고 불렀다)에는 금빛 휘황 찬란한 빌딩이 서 있었다. 신용보증기금 빌딩. 그리고 교차로엔 홀딱쇼와 빠구리 쇼로 유명세가 떨쳤던 제일나이트클럽이 있고. 그리고 신보빌딩 맞은 편으론 서울에서 목살구이가 가장 맛있다는 골목이 있고. 그 뒤로 홍등가가 있고. 그리고, 오거리(로터리)로 나오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돼지껍다구와 돼지갈비를 파는 최대포집이 있고.

 

이 정도 말하는 다 알거다. "맞아,, 거기!!!" 하고. 마포 공덕오거리, 공덕로터리. 가난한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자취를 하던 동네. 대로변으로 삐까번쩍한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데, 그 건물 뒤로는 지지리도 못살던 달동네보다는 조금 나은 그런 동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동네 주인집 아저씨들 다 엄청난 부자들이다. 세입자들이야 개털이지만, 주인집들이야 다 그 동네 32평, 38평 마파드 한두채로 다 보상받았으니.

 

나중에 그 거리를 찾아가 보니 아무 것도 없다. 밤에 수줍게 목욕하던 처자들, 새댁들도 없고, 남들 목욕하는거, 빠구리 치는거 훔쳐보러 다니는 젊은 것들도 다 없고. 꼬불꼬불 골목길에서 놀던 초딩들도 다 없고. 거기엔 그냥 건물들이 죽죽 올라섰고, 고층 아파트들이 다 들어섰다. 최대포집도 없어졌고, 한달에 한번 겨우 찾아가는 목살구이집들도 없어졌고. 한때 김영삼이, 김대중이 입주하여 대통령을 두명이나 탄생시켰다는 당시 마포최고였던 마포제일빌딩은 초라하기 그지없고(지금은 있으려나?) 마포제일빌딩 가장 꼭대기에는 당시 홀딱쇼, 빠굴쇼로 명성을 날렸는데.

 

지금도 가만히 앉아 옛 일을 생각해 보면 이때가 가장 좋았던거 같다. 아무 생각없이 살때가 가장 행복한거 같다. 뭘 알면 복잡해진다. 가난했어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살고, 아무 생각없이 빠구리치고. 어쩌다 돈이 생기면 오랫만에 위장에 기름칠한다고 먹던 돼지껍다구, 돼지갈비, 목살구이, 그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거기에 겻들여 먹는 최루탄 안주. 전두환을 찍어내릴거라던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목이 찢어져라 '독재타도'를 외쳤고, 그 함성과 구호는 '조국통일'로 다시 번지고.

 

(낙서방에 빠구리 얘기 쓰면 안되나요? 이 이야기는 빠굴 경험담이 아니고 그 시절 그 거리 얘길 하다보니 자연스레 양념으로 빠구리 얘기가 나온거니 다들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