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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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20 9:56:
SAS
전세계 특수부대 가운데 영국의 공수특전단(SAS)만큼 유명세를 누리는 조직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식 특수부대의 원조격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미국의 그린베레나 SEAL팀 역시 선배격인 SAS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존경을 표시하곤 한다. 그만큼 발족 이후 지난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SAS가 특수전사에 남긴 족적이 크다는 반증일 것이다. 앞서 어느 독자께서 간략하게 소개하신 것처럼 SAS의 창시자는 데이빗 스털링이었다. 역설적으로 스털링이 SAS 발족을 고한하게 된 것은 바로 병원이었다. 당시 낙하산 강하훈련으로 부상을 당한 스털링은 파죽지세인 롬멜 원수 휘하의 독일군 `아프리카군단'(Afrika Korps)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보급로와 공군기지 등 전략적인 가치가 높은 시설물에 대한 교란과 기습파괴작전이 절실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이집트 주둔 영국군 수뇌부에 전달하고 이 임무를 수행할 신종 특수부대의 발족을 설명했다. 수뇌부의 반응은 의외로 빨랐다. 즉각 창설을 서두르라는 지시였다. 41년의 일이었다. 스털링을 지휘관으로 한 SAS는 `사막기습특공대'(Desert Raiding Party)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발족됐다. 이들은 기동성이 뛰어난 랜드로버 차량을 이용해 작전을 전개했다. SAS의 첫 성공작은 41년 12월에 나왔다. 2차례에 걸친 이 작전에서 SAS는 적항공기 81대를 파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전선이 점점 유럽본토로 옮겨가자 SAS도 선봉장으로 주무대를 프랑스 등 유럽으로 옮겼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SAS는 적사살 4,784명, 장갑차와 트럭 등 각종 작전용차량 파괴 70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SAS는 잠시 해체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영국정부는 기습특공작전을 포함한 사실상 거의 대부분 특수전 기능을 해병대에 이관했다. 영국해병대가 오늘날 특공대(Royal Marine Commandos)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조치 때문이다. 영국정부의 이런 결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후 아시아와 중동 각지에서 불어닥친 옛식민지의 독립열풍과 이에 가세한 공산게릴라들의 준동은 영국의 전후세계운영구도에 큰 위협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보르네오, 말레이시아, 오만, 아덴 등지의 반란 불길은 그냥 좌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양상이었다. 이에 영국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해체됐던 SAS를 제22 SAS연대로 재편했다. 이에 투입된 SAS 대원들은 울창한 정글수목에 대한 낙하산 강하(Tree Jump)와 현지민들에 대한 선무공작(Hearts and Minds Tactics).기습 등의 새로운 전술을 통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본국으로 철수한 SAS는 고질적인 `골칫거리'인 북아일랜드에 투입돼 아이레공화국군(IRA)의 소탕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SAS가 일반에 알려진 가장 큰 사건은 바로 80년 5월 런던주재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이다. 대테러팀(CRW)팀 소속 대원들은 대사관의 지붕에서 레펠로 진입하는 등 전광석화 같은 작전을 전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고 1명을 제외한 테러범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곧이어 발생한 포클랜드전(82년)도 SAS의 값을 올리는데 한몫을 톡톡히했다. 해병대 소속 SBS(Special Boat Squadron.현재는 Sepcial Boat Service로 확대개편됨)와 함께 아르헨티나군 배후에 잠입, 각종 정찰/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이 전쟁에서 SAS가 거둔 가장 큰 전과는 다름아닌 페블섬 기습작전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페블섬에 對지상기 푸크라를 배치해 영국군의 상륙과 지상작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항공전력이 약세였던 영국군으로서는 이를 제거하기 않고서는 성공적인 탈환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SAS는 야음을 틈타 고무보트(제미니)로 페블섬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다.작전은 대성공이었다. 12대의 푸크라기가 대파됐다. 걸프전 당시 SAS의 무용담도 가히 전설적이다. 전쟁 초기 SAS는 이라크 본토나 점령지인 쿠웨이트에 대한 잠입과 정보수집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쟁이 중반전에 접어들면서 SAS는 골칫거리인 이라크군의 이동식 스커드미사일발사대 수색과 파괴공작에 나섰다. 미국의 Delta Force와 합동으로 전개된 이 작전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브라보 투 제로'팀의 일화다. 스커드 수색에 나선 브라보 투 제로팀은 재수없게 이라크군의 포위망에 걸렸다. 팀은 치열한 교전을 통해 시리아국경으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180km에 이르는 국경까지의 탈출시도에서 8명의 투입인원 가운데 3명이 사살되고 4명이 적의 포로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겪기도 했다. 무사히 국경을 건넌 것은 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SAS대원들은 250명이 넘는 적군을 사살하는 믿기 힘든 전과를 거뒀다(이 무용담은 당시 팀장이었던 앤디 맥냅의 `브라보 투 제로'를 통해 일반에 소개됨.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작전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SAS동우회에서 영원히 제명되는 비운을 겪음). 현재 SAS는 현역인 제22SAS연대와 예비연대격인 제21, 23연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주, 뉴질랜드 등에도 이를 본딴 연대가 운영중이다. 최근까지 22연대본부는 히어포드에 있었으나 최근에 영국 공군기지가 위치한 크레덴힐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22연대의 병력은 550명선으로 이는 다시 A,B,C,D 등 4개의 작전대대로 나눠진다. 또 각 대대에는 32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중대가, 중대 밑에는 8몀으로 된 소대가 각각 운영된다. 각 중대는 다시 침투방식에 따라 고공팀(HALO), 수상팀(Boat), 지상기동팀(Mobility), 산악/극지팀(Mountain)으로 구성된다. 이와는 별도로 대테러임무를 전담하는 팀(CRW)이 운영된다. SAS에 지원을 원하는 사람은 군에서 3년 이상 복무한 장.사병으로 3주간의 선발과정을 거쳐 1년 가까운 전문과정을 거친다. 현재 SAS는 SBS와 함께 합동특수전국(Special Forces Directorate)를 구성하며 관례상 국장은 SAS출신 준장이, 부국장은 SBS대장 출신의 대령이 맡는다. SAS는 또 미국과 이미 지난 60년초부터 연락장교제를 운용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Delta Force의 창시자인 챨스 벡위드가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SAS와 SBS의 전력을 비교하는 글이 여러번 관계전문지에 개제된 적이 있는데 이를 보면 최근들어서는 SBS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SBS대원들은 이미 해병특공대에서 3년 이상의 전문과정을 거친 자들만이 지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원 개개인의 능력면에서는 SBS가 앞선다는 평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난 평론가 개인의 견해이므로 크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참조적으로 지금까지 SAS를 다룬 수십권의 관련서적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평을 받고 있는 것은 영국 언론인 Tony Geragthy의 `Who Dares Wins'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