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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에서의 허와실
moby | 추천 (0) | 조회 (395)

1999-12-22 10:52

83년 10월 23일 저녁 카리브해에 위치한 그레나다섬항 40km 상공. 고요함을 뚫고 미 공군특전사 소속 2대의 MC-130E 수송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뒤 수송기로부터 꽃잎들이 하나씩 피어났다. 낙하산이었다. 모두 18개의 꽃잎은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졌다. 앞서 떨어진 2개의 꽃잎에는 고무보트가, 나머지 16개에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낙하산에 매달린 사람들 가운데 12명은 미 해군특수부대인 SEAL대원들이었다. 나머지 4명은 미 공군특전사 소속 전투관제팀(Combat Control Team)이었다. 특히 SEAL대원들은 '제디'라는 별명을 가진 최정예 6팀 소속이었다. 제디는 텔레비젼의 인기프로그램인 '스타워즈'(Star Wars)에 나오는 전전후 戰士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도대체 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로 낙하산 강하를 했을까.
미국이 그레나다 침공에 앞서 정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살리나스 공항이었다. 미국은 이곳에 육군의 제75 레인져연대를 투하시켜 후속부대들의 항공수송을 위한 교두보로 확보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공중정찰을 통해 살리나스 공항의 지형물 특히 레인저 대원들의 낙하산 강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공화기의 정확한 위치와 수량 파악에 나섰으나 정확한 내용 파악에는 실패했다. 결국 작전지휘부는 SEAL 대원들을 주축으로 한 특수정찰조를 현지에 잠입시킨 뒤 레인저의 강하를 지상에서 유도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해상강하를 통한 잠입에는 SEAL 대원들이 제격이지만 지상에서 낙하산 강하를 유도하는데는 공군의 전술관제팀이 앞선다는 갑론을박 끝에 수뇌부는 특수정찰조를 해-공군 합동팀으로 구성했다.
잠입의 실행단계는 겉으로는 간단하게 보였다. 우선 적의 지상관측망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살리나스항 북서쪽 40km 지점 해상에 특수정찰조를 낙하산을 통해 투하한다. 강하에 성공한 뒤 특수정찰조는 다시 먼저 투하된 조디악 고무보트를 회수해 탑승한 뒤 목표 해안으로 이동해 소수의 수영정찰조로 하여금 사전정찰을 실시케한다. 사전정찰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신호가 오면 나머지 특수정찰조는 공항에 접근해 적 병력과 대공화기의 배치현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전투관제팀 소속 4명의 대원들이 레인저대원들의 낙하산 강하를 유도하기 위한 레이더 비이컨을 설치하기로 돼 있었다. 또 특수정찰조가 강하한 주변 해상에서는 구축함 케이런호가 대기해 작전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전계획이었을뿐 실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당초 특수정찰조는 야간이 아닌 낮시간에 해상강하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강하시간이 황혼 무렵으로 지연됐다. 야간에 실시하는 해상강하는 웬만한 프로들도 꺼릴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통상적으로 낮시간 300m 이내 상공에서 실시되는 해상강하의 경우에도 정확한 낙하산 분리고도를 가늠한다는 것은 어렵다. 물 위 5m 이내에서 낙하산을 분리하지 않을 경우 나일론으로 된 낙하산은 그대로 물 아래로 곤두박질쳐 자칫 강하자를 익사시킬 우려가 크다. 하물며 야간에는 정확한 분리고도를 가늠한다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원들이 착용한 장비의 무게는 더욱 작전의 실패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대원 한사람당 70-80kg의 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설사 구명조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제대로 부력이 일지 않아 수장되기 십상이다.
낙하산 역시 문제였다. 대원들은 그동안 방향조정(조향)이 가능한 고공강하용 낙하산에 익숙해왔다. 그러나 왠일인지 이번 작전에서는 조향기능이 거의 없는 일반형 MC-1 낙하산이 제공됐다. 착수한 이후에도 문제는 계속됐다. 대원들 간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조명신호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이들은 한동안 칠흑같은 바다 위를 마냥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부 대원들은 물 밑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소총을 발사하거나 동료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으나 대부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태에서 작전의 성공을 바란다는 것은 시쳇말로 '어림 반푼'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바다와 낙하산 강하에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6팀 소속 대원 4명이 익사하는 어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동료의 생사를 확인할 틈도 없이 나머지 대원들은 부여된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 조디악 고무보트를 수거한 뒤 목표지로 향했다. 얼마쯤 흘렀을까. 그레나다군의 초계정이 보트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특수정찰조 대원들은 보트의 엔진을 끄고 죽은듯이 보트 위에 엎드렸다. 다행히 초계정은 이들을 발견하기 못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다시 불운의 여신은 계속 심술을 부렸다. 강하시 충격을 받아선지 아니면 초계정이 지나치면서 그랬는지 보트의 엔진이 작동하지 않았다. 대원들이 긴급수리에 나섰지만 허수고였다. 설상가상격으로 보트는 강력한 해류에 밀려 목표지에서 점차 벗어나 밤 바다를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몇시간의 표류 끝에 특수정찰조는 임무를 더이상 수행할 수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구축함과 접선을 시도했다. 다행히 이번만은 성공이었다.
다음날 저녁 대원들은 다시 보트로 목표지로 잠입을 시도했으나 전투관제팀이 탑승한 보트가 높은 파도에 휘말리면서 휴대한 장비를 모두 잃어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결국 작전지휘부는 더이상 이를 강행할 필요가 없다는 뒤늦은 판단 끝에 작전취소를 지시했다.
이 작전은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겨줬다.
우선 간단한 것을 무시하고 왜 일을 복잡하게 진행시켰나는 의문이다.다시 말해 목표지 인근 해상에 지원구축함이 배치된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무릎쓰고 야간에 낙하산 강하를 강행할 필요가 있었냐는 점이다. 구축함을 모함으로 해 얼마든지 목표지 잠입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한 지휘부의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둘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사전준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낙하산을 통해 투하된 보트의 모터는 아무리 완벽한 충격흡수포장을 했다고 해도 손상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 아래 예비용 모터를 함께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세번째, 특수전의 경우 임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소 호흡을 같이 한 대원들 - 또는 팀 - 단독으로 투입하는 것이 옳은데도 서로 '파이'를 나눠 갖기 위해 경쟁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함께 투입시킨 지휘부의 무식과 오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할 점은 바로 386 정도의 컴퓨터면 충분한 사안에 굳이 586 팬티엄급 자산을 투입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살리나스 공항에 대한 정찰 임무는 對테러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6팀 대신 해안목표물에 대한 일반정찰이 전문인 4팀(예비대)를 투입하는 것이 어쩌면 더 효율적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 특수전연구가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결국, 이 작전은 실패를 예상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강행한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새삼 보여준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를 남긴 대통령은 누굴까? 이런 질문을 받는 미국인들은 한결같이 존 F 케네디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두 사람을 손꼽는다. 물론 일부는 빌 클린턴을 지목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보다는 확률이 적을 것 같다. 케네디와 레이건 두 사람은 미국 특수부대원들 사이엔 거의 우상과 같은 존재다. 두 사람 모두 질량면에서 특수부대의 증강을 부르짖고 이를 실천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레이건에 이어 대원을 잡은 조지 부시 대통령은 시쳇말로 '짱 운좋은' 인물이었다. 재임기간중 소련의 붕괴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몰락을 지켜본데다 걸프전을 아랍권까지 끌여들여 승리로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 명분과 실리면에서 '남는 장사'를 한 통치자라는 것이 세인들의 평가다. 부시행정부는 두차례에 걸쳐 해외무력개입을 했다. 그 하나는 앞서 잠시 언급한 걸프전이고 다른 하나는 파나마 침공이다. 비록 걸프전이 독재자의 침략에 대항해 우방국들이 홀연히 맞서 이를 격퇴시켰다는 명분을 쌓을 수 있었던 반면 파나마 침공은 다분히 감정적인 성격이 강했다. 파나마 침공에 대해 미국의 '맏형'격인 영국조차 공식논평을 자제할 만큼 우방국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89년 12월20일 감행된 파나마 침공의 목적은 무엇보다 미국에 반기를 든 파나마 군부실력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침공 직후 마를린 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은 (1)파나마 거주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2)파나마운하의 안전보장을 규정한 파나마조약의 준수 (3)마약사범으로 기소된 노리에가의 체포와 미국으로의 송환 (4)독재 아래서 신음하는 대다수 파나마인들을 위해 민주헌정질서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수사(Diplomatic rhetoric)에 불과했다.
정작 침공의 진짜 목적은 노리에가의 거세였다. 노리에가는 미국행정부로서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때 미국은 노리에가가 실권자로 부상하는데 가장 강력한 후견인 노릇을 자임했다. 그러나 실권을 잡은 노리에가는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미국의 젖줄과 마찬가지인 파나마운하의 국유화를 시도하는 한편으로 쿠바 같은 역내 사회주의국가들과도 교류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그는 이런 자신의 정치.외교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실탄 비축'을 위해 마약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외교채널을 통해 노리에가의 이런 '튀는'행동에 제동을 걸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으로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노리에가가 쿠바의 카스트로 못잖게 귀찮은 존재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파나마 침공은 결국 이런 정치적 판단에 따라 감행됐다는 것이 지배적인 국제여론이다. 정치.외교적인 측면을 제외하고서라도 파나마침공은 군사적으로도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특히 미국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이 작전은 하나의 '분수령'이됐다. 무엇보다 그동안 각군별로 나뉘어져 사분오열(四分五列)양상까지 보여온 육.해.공군특수부대들이 적어도 외형상으로나마 하나의 통합지휘부(Combined Command) 아래서 작전을 실시한 첫 사례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은 이 작전에 모두 4천100명의 특수전병력을 투입했다. 또 이들의 수송과 화력지원을 위해서 모두 71대의 특수전항공기들이 투입됐다.
그러나 이 작전은 투입된 병력과 이에 따른 국제적 비난여론에 비해 성과면에서는 회의적이라는 것이 특수전연구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