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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1월 13일]
sleeping | 추천 (0) | 조회 (270)

2000-01-14 07:53


1.13 목요일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오늘의 만남 - 김미라 님(방송작가)

어머니와 우체국

"나는 우체국 앞을 지나가지 못해, 우체국만 보면 눈물이 쏟아져서 멀리 멀
어진 길로 돌아간단다. 가서 엄마라고 쓴 편지를 보내고 싶고, 어렵게 사시는
엄마한테 우편환도 보내고 싶은데, 그게 안 돼..."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간호사로 일하던 한 선배는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버려다지피 자라났다. 사춘기를 보내고,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선배는
서울로 와서 간호대학의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외
로움을 누구보다 많이 겪었기에 선배는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부
했다.
결혼할 때에도 '고아'라고 말했고, 고아라는 편견을 어렵게 극복해 내고서
야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일궈낼 수 있었다. 선배에게 가정이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의미였다. 자신의 성장기에 받은 상처를 보상받고 싶어서라도 가
정에 몰입했고 그만큼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는 어머니가 홀로 병든 채 바닷가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처럼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
하며 그 힘으로 살아왔던 선배는 그 소식을 듣고 난 다음부터 넋 나간 사람처
럼 살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 자식을 버리고까지 갈 걸음이었으면 끝
까지 행복하게 잘살지 그랬느냐며 선배는 많이 울었다.
오래 전 부터 우체국 앞을 지날 때면 아주 행복한 딸처럼 편지 한 통이라도
쓰고 싶었다는 선배,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우체국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먼길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가족
을 너무나 오래 고통스럽게 한 이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선배의 어머니는 기어이 홀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야 어머니
와 만난 선배는 어머니의 관을 끌어안고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평생 만나지
못한 것보다,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달려가 만나지 못하고 보살펴 드리지
못한 설움 때문에 선배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우체국 앞을 지날 때면 이제는
가슴아파할 어머니도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 때문에 선배는 더욱 서러울 것이
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한 발씩 늦는 것일까.
요즘은 우체국 앞을 지나는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
체국 앞에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선배처럼 너무 늦어
지기 전에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가서 편지를 쓰고 전보를 보낼 수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오늘의 생각 - 집 생각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무렵, 쌍둥이인 우리 자매는 중학교 진학을 둘 다
할 수 없는 집안 형편을 잘 아는진라 방학을 이용하여 학비 벌 궁리를 했다. 반
대하는 부모님을 졸라 하게 된 일이 식모살이였다. 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아버
지와 버스를 타고 부산 어느 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으대에 다니는 아들,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잘 부탁한다며 잡고 있
던 내 손을 놓고 뒤돌아 가신 뒤 아주머니가 머뭇거리는 나를 불렀다.
"너는 집안 청소하고 집만 봐주면 돼, 그러면 방학이 끝날 때 학비를 주마."
그 뒷날부터 내가 하게 된 일은 쌀을 씻어 놓거나 설거지하고 집을 보는 일
이 전부였다. 하루는 아주머니가 복숭아를 한 박스 사오셔서는 깨끗이 씻어 냉
장고에 넣으라고 하셨다. 수돗가에 앉아 복숭아를 씻으면서 얼마나 침을 삼켰
는지 모른다. 하나만 먹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먹지 않았다.
그 즈음 자꾸 집 생각이 났다. 혼자 있을 때 거울 앞에 서면 눈물이 퐁퐁 쏟
아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이런 나를 보고 "엄마, 복 싶어?" 하며 아이스크림
을 주곤 했다. 난생 처음 먹는 아이스크림이었지만 그때뿐, 하루하루 집 생각
은 더해만 갔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기어이 발을 구르며 "엄마 엄마"하고 울
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가 오셨다. 어버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렇게
좋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되었지만 한 번씩 집에 다니러 가면 아버지는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우리 고추밭고 옥수수밭, 너른 논을 둘러보시며 농사가 잘
되었다며 자랑하신다. 그러면 나는 그때 말없이 나를 품에 안으시던 아버지의
가쁜 숨결이 떠오르곤 한다. 김은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