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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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17 05:13
아름다운 추억
나이를 먹어감에따라 머리속에 무었하나 온존히 남아있지를 않고 흐릿해가는 기억과 뒤엉켜
가물거리기만 하여 애써 끄집어낸 기억의 타래도 어느샌가 흐트려진 매듭을 이을수없어 난
감해 하곤 한다.
여기에 후일을 위하여 어릴적 기억의 편린을 주어모아 보고자 한다.
아침조회를 마치고 들어온 교실은 선생님이 오시기까지 왁자하니 시장판처럼 소란스러웠다.
매주 월요일마다 조회가 끝나면 늘상 그러하였지만 특히 오늘은 조회시 새로 부임하신 여
선생님이 분명히 우리반인 6학년2반을 맏으실거라고 교장선생님께서 소개말씀을 하신 탓도
있어서 그 기승이 한갑절 더하였다.
우리는 엄마가 기성회 회장인 덕에 소식통으로 알려진 명길이 주변에 모여 무슨 새로운 정
보라도 들으려고 제법 자리다툼을 해가면서 몰려들었으나 오늘따라 명길이도 묵묵부답이였
다. 하기사 제놈인들 일일이 다 알수는 없는 노릇이 였을터였다.
갑자기 물을 끼얹은것처럼 이상한 침묵이 휩쓸고 지나가자 우리들은 서로 두리번 거리다 다
시한번 까르르 웃어대었다.
바로그때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우리의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우리들은 창졸간에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제자리를 찾았었고 황망하게 서 계신 선생님을 향
하여 급장인 영춘이가 "차렸, 열중셧, 차렸, 선생님께 경례"하며 속사포처럼 쏘아대었고 우
리들은 큰 소리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으며 너 나 할것없이 입가에는 웃
음이 가득 하였다. 이미영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었다.
새로돋은 여린잎으로 탱자나무 울타리가 가시를 숨기고, 탱자나무가 뽑혀나간곳에는 개나리
넝쿨이 노란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대더니 어느새 계절은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급장인 우영춘, 손명길, 장용석등 개구쟁이 왈패들이 잔뜩 모여있는 우리반이
학년별 모의고사 성적이 반듯할리 없건만은 야단한번 없이 그저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던
우리 선생님... 무슨 강조기간이 그리도많던 그시절 별 신통한 성적한건 못올리던 우리반도
대청소 주간이나 환경미화 심사기간 만큼은 미술에 남다른 솜씨를 지닌 우리 선생님의 덕분
에 발군의 성적을 올릴수가있었으며 특히 춘계환경미화 대상(전교 1등)도 받아 내었다.
그때 환경미화를 한답시고 영춘이와 몇몇이 남아서 이리저리 끙끙대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그때만 해도 귀한 과자를 한아름 사오셨다. 겉치례 사양을 몇번하다 이내 악귀처럼 서로 흟
겨보며 양볼로 으걱거리며 미어져라 먹는동안 선생님께서는 팔을 걷어 부치시고는 흥얼흥얼
그저 듣기에도 애잔한 선율의 콧노래를 부르시며 신명난 듯이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 하였
다. 그제사 우리들은 선생님의 노래소리에 이글리어 슬그머니 선생님 주위로 모여갔으며, 거
침없이 그려나가시는 그림솜씨에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창문틈으로 봄바람이 하늘거리며 넘어들때마다 선생님몸에서 풍겨나오는 향긋한 분내
음은 엄마나 누나의 품속에서 맡아보던 포근하고 아늑한 향기 바로 그것이였었다.
넉넉한 품새로 솟아있는 가슴과 풍요롭게 퍼져있는 허리와 아랫배가 노래가 쉼터에 멎을때
마다 가빠진 호흡에따라 일렁일때면 우리들의 가슴도 덩달아 야릇하게 콩닥였으며 마치 선
생님의 넓은 품속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가서는 아늑하게 쉬고있는것만 같았다.
언제 부터인가 몸뻬입은 엄마 보다도, 교복입고 깍쟁이같은 누나들 보다도 기운이 없는 듯
하면서도 언제나 웃어주시는 우리 이미영 선생님이 더 좋아지기 시작 했으며, 그것은 나 뿐
만이 아니라 우리 일당 모두가 그렇게 생각 했으리라 싶었다. 그것은 곧 선생님에게 보다더
예삐 보이려 치열한 눈치 싸움으로 이어졌으니까 말이다.
특히 급장인 영춘이와의 피말리는 싸움은 남의 눈에도 다들어날 만큼 요란 스러웠었다.
엄마에게서 느끼는 어른여자의 편안함과 포근함의 연장상에서 느껴보는 그 아늑한 품새며,
생활에 찌든탓에 이따금 신경질을 보이는 엄마보다는 언제나 희미하게 웃어주시는 선생님의
따뜻함, 그리고 그 예쁜 모습에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곧 이미영 선생님의 숭배자가 되었으며 커서는 훌륭한 사람이되어 우리 선생님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자고 서로 다짐 하곤 하였다.
학교가 파한후면 우리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선생님의 손을 끌기도
하면서 학교 뒷산에서 올라 저멀리 강넘어 산으로 사라져가는 저녁해 탓에 묽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선생님께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고는 하였다.
그때였었다 선생님께서 시름을 벋어둔채 천진난만하게 밝게 웃으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였
다. 우리들의 팔을 잡아 당기시기도 하고 품어주시기도 하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기쁜
듯이 깔깔 웃으시기도 하였다.
우리는 또다시 다짐에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훌륭한 어른이되어서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여름 방학이 다가오자 광복절 경축식이 끝나면 선생님 댁으로 놀러 가기로 약속하였으며 나
는 팔월들어 하루도 빼 놓지않고 엄마를 조른 끝에 수만가지의 주위사항을 들은 다음 겨우
허락을 받을수가 있었으며, 잔뜩 찌부러져있던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 둘 펴지기 시작하는
꼴이 틀림없이 나처럼 고초를 격은 후 였으리라 짐작되어진다.
우리들은 그당시로는 먼길 나들이인 것을 선생님 댁이라는 덕분에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난
생 처음의 먼길을 떠날수가 있었다.
밀양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겨우 버스에오른 우리는 먼지길 산길을 한참 달려 밀양 단장면의
무슨 마을을 찾아 또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갔었다.
선생님의 댁은 코딱지만한 삽짝마당이 붙어있는 초가집이였었다. 할머니(선생님의 어머니 :
어린눈에는 할머니로 보였음)가 반겨 주셨으며 일일이 우리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주
시면서 꼭꼭 품어주셨다. 우리들은 멋적어 하면서도 그 품이 마냥 좋아서 떨어지기가 서운
하였다.
우리들은 문간채의 방에 들어가서 짐을 정리한후 할머니가 삶으시는 옥수수의 구수한 내음
에 끌려 마당뒷켠의 아궁지로 몰려갔었다.
해가 누웃거릴쯤 선생님은 화판을 들고 뚝길을 따라 가셨으며 우리들은 물통이랑 화구를 챙
겨들고 따라나섰다.
뚝 안쪽의 냇가에는 군데군데 여러해전 수해로 파여진곳이 자갈밭을 이루고 있었으며 뛰엄
뛰엄 솟아있는 미루나무들이 바람결에 쏴~~하며 진져리치듯 잎을 떨때마다 매미소리가 실려
서 날라왔다.
선생님은 곧 화구를 정리하시고는 화판위의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했다.
건너편 뚝길과 자갈밭, 그리고 미루나무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할쯤 우리들은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하였으며 누가 먼져라 할것없이 냇가로 돌을 던지기도하고 물을 튀기기도
하면서 선생님의 주위를 끌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산만함에 무어라 꾸짖기라도
할법한데도 선생님께서는 이다금씩 우리들을 바라보시고는 여전히 가볍게 웃으시기만 하셨
다.
2학기가 시작된후 얼마 않되어 우리 선생님 께서는 학교를 그만 두시게 되었으며 그뒤로 호
랑이 같은 남선생님이 우리 반을 맏으셔서 닥달에 닥달을 거듭하셨다.
지옥과도같은 고통의 나날이 계속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우리들은 함께모여 어서 어른이 되
어서 선생님을 모시러 갈날을 기다리며 다짐에 다짐을 하곤 하였다.
곧이어 닥쳐오는 중학교 입시준비랑 또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눈
코 뜰새없이 바쁜속에서도 간단없이 밀려오는 그리움과 함께 이미영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일들이 떠올랐으며 그럴적마다 흐릿해저가는 눈망울 저 위로 선생님의 모습이 아른거리고는
하였다.
우리들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다시모여 선생님의 밀양의 댁으로 찾아 나서게 되었다.
영춘이가 가지고있었던 주소를 들고 기억을 더듬어 겨우 찾아 갔을때는 긴긴 여름해도 뉘였
거리고 있는중이였다.
할머니게서는 전에 처럼 일일이 우리들을 쓸어주시고 품어주셨지만 끝내 흐느끼시고야 말았
다.
그날저녁 우리들은 호롱불 앞에서 할머니로부터 선생님의 그간의 사정을 들을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위로는 오빠 한분이 게셨지만 서울에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
어 가버리시고 할머니와 함께 게셨다는 것, 여학교때에는 공부도 잘하셨지만 특히 그림에
소질이 있었으나 대학갈 형편이 안되어 교육대학(2년제에다 취직이 잘 되므로)에 가셨다는
것, 그리고 평소에 몸이 약한데에다 결핵을 앓으셨다는것과 어릴적부터 형제가 적어서 정에
주린탓에 우리들을 그처럼 귀여워 해 주셨던일들을 눈물과 한숨을 뒤섞어가며 조용히 들려
주시던 할머니께서도 마침내는 서러움에 북받치는 울음을 터트리시고야 말았다.
선생님께서는 올겨울 한창 추위가 심할 때 병을 이기시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셨다는 할머니
의 울먹이시며 뛰엄뛰엄 들려주시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너나 할것없이 모두들 훌쩍거렷으며
그모습이 하 애닯아 서로들 바라보며 다시 흐느끼기를 그치지않았다.
다음날 떠나올 때 할머니께서는 선생님께서 우리들이 곡 올태니까 그때 주라시며 싸 두셨던
꾸러미를 내미셨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주의에따라 익숙해진 사래짓으로 몇번을 사양해 보
았지만 예사 물건이 아닌듯도 하여 명길이가 받아들었었다. 할머니께서는 그것이 학교를 그
만두신 뒤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요양하시던 선생님께서 우리들이 오면 주라고 하시면서 그
려 놓으신 그림이였다.
그제사 우리들은 할머니게 고맙다는 절을 몇번이나 올리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기차가 밀양역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자 덩치가 큰 짬에는 유난히도 정이많은 용석이 녀석은
아예 엉엉 울고있었으며, 나는 그런 용석이의 어께를 껴앉고서는 다독이며 달래고 있었다.
영춘이와 명길이도 그런 우리를 보며 연방 떨어질것같이 방울져가는 눈물을 털어내려는 듯
눈을 껌벅이면서도 그 그림이 궁금하엿는지 부시럭 거리며 종이 겉포장을 벗겨내고 있었다.
눈물로 일렁거려 흐릿해진 시야에도 몇 년전에 보았던 그구도의 그림임을 알수가 있었으며
곱게 채색되어싯는 것 같았다.
나는 용석이를 달래는 중에도 그림을 자세히 볼 심산으로 눈 가를 훔쳐 내고는 고개를 내밀
어 그 그림을 바라 보았다. 화폭의 대각선을 따라 구부러저가는 냈가의 건너쪽 뚝길에는 미
루나무들이 서 있었으며, 냇가에서 노니는 아이들은 우리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건너편 뚝길이 수해로 무너지며 생겨난 그 자갈밭에는 그 자갈 밭에는
아아아아......선생님이 그리신 그 그림의 자갈 밭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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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밭 뚝길을향해 황혼녁의 엷은 햇살에 금빛털로 물들은 커다란 소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아아아...나는 왜이리 끝맺음을 잘 못하는지................실례 많았읍니다.....시일례.....